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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Aug 08. 2023

바위가 되는 법

관광객처럼 동네 산책하기


1. “집이 좀 멀지…” 친구들 초대할 때면 사과부터 했다. 서울 서쪽 끝자락 은평구의 수색동에 자리한 집. 대중교통에서 하차한 후에도 한참 걸어 언덕을 올라야 한다. 근방 10분 이내에 카페가 하나도 없고, 편의점도 하나다. 이른바 재정비촉진구역인데, 주거환경이 낙후된 주택지라는 거다.


2. 이 집을 고른 건 (1) 집값이 싸고 (2) 회사와 가까워서였다. 상암동에 위치한 회사까지 도보로 25분 정도다. 토끼굴을 지나 출퇴근하는 길이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디지털미디어시티’와 ‘수색재정비촉진구역’은 철도 하나를 사이에 두고 완전히 다른 세계다.) 이 동네를 다르게 감각한 건 본격적으로 따릉이를 타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페달을 밟으며, 동네 지면의 높낮이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인식하게 됐다.


3. 이동 수단에 따라 도시는 다르게 구성된다. 정지돈은 <스페이스 논픽션>에서, GPS 맵과 SNS는 서울의 숨은 가게들까지 구석구석 찾아내지만 지도와 현실 사이의 공백은 여전하다고 말한다. 자전거 생활을 시작한 후 가보지 않은 동선에 대한 주저함이 다소 사라졌다. 건축가 강예린의 말처럼, ‘주거와 노동의 단선적 동선’이 흐트러지고 ‘쇼핑 이외에 도시와 관계 맺지 않은 삶’에 균열이 인다.


4. ‘안녕히 가십시오’ 서울의 해치를 지나 고양시 다이소로 쇼핑을 가고(서쪽), 서대문구의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동쪽), 점심시간엔 혼자 난지한강공원으로 탈출하고(남쪽), 때때로 불광천을 따라 연신내까지 올라간다(북쪽). 한편 정지돈은 하나의 수단이 아닌 여러 장치를 갈아타며 이동하는 ‘움직임의 교차’가 우리의 정체성을 유연히 만들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전동킥보드를 선호하는 듯했다.


5. <도둑맞은 집중력>을 읽고 나서는 도보 생활도 약간의 변화를 맞이했다. 책은 한 꼭지를 할애해 딴생각을 예찬한다. 우리가 정신을 배회하게 내버려 뒀을 때, 우리의 정신은 서로 다른 것을 연결하며 독특한 통찰을 낳는다는 것. 딴생각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핸드폰 없는 산책이다. 바람이 선선히 불던 어느날엔 이어폰도 빼고 고개를 들고 걸었다. 가정식 중국 뷔페와 나무 공방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항상 그 자리에 있었는데도.


6. 느닷없이 자전거를 타고, 핸드폰 없는 산책을 시작한 건 아니다. 언제부터였는지 생각해 보면, 그건 3일 이상의 긴 휴가를 가졌을 때였다. 자전거를 함 타볼까, 그러니까 ‘불현듯’이 가능하려면 잉여 시간이 필요하다. 전세 계약을 연장하며 동네에 더 애착이 생기기도 했다. 그전까진 수색동은 단 ‘2년짜리 동네’였다. 나의 변화는 노동의 조건과 청년의 주거 문제와도 무관하지 않다. 정지돈이 말한 ‘움직임의 교차’, 이동수단의 평등함도 결국 계급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나는 언제 자차를 가질 것인가? 가져도 문제다. 회사의 주차 대기만 몇 백 명이다.)


7. 그래도 <이다의 자연관찰일기>를 읽으면 눈 밝은 탐구력에 웃음이 난다. 작가는 나와 비슷한 주거 환경(은평구, 언덕 위의 평수 작은 빌라)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다. (1) 언덕 위에 있음→전망 좋음 (2) 칙칙한 바위벽→자연의 보고 (3) 교통 불편함→사람 적음 (4) 외짐→자연 풍부… 과연 그러했다. 특히 우리 집 바로 뒤엔 서울시와 고양시 사이에 걸쳐진 멋진 봉산이 있다.  


8. 이다 작가의 여정은 일본의 철학가 아즈마 히로키의 책 <관광객의 철학>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진지한 태도가 아니라, 관광객의 태도. 호기심 넘치는, 가벼운, 때론 경박한 접근이 우연을 만나고, 이런 우연이 예상치 못한 경로가 새로운 사건을 조우하게 만든다. 매일 같은 동선으로 걷던 동네를 관광객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자. 지도에 숨겨졌던 감춰진 곳이 드러난다. 거기엔 물까치가 있고 이팝나무가 있고 러브버그가 있다.


9. 사고를 전복하면, 내가 ‘관광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리움 전시관에서 열리는 김범의 <바위가 되는 법>엔 수업을 듣는 사물과 바위가 되려는 인간이 있다. 장강명 작가의 신작, <당신이 보고 싶어 하는 세상>에 수록된 ‘나무가 됩시다’는 착취된 동식물을 먹지 않기 위해 스스로 식물이 된 사람이 주인공이다. ‘나’는 인간이 점령한 땅을 원주민인 동식물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10. 처음 수색동에 왔을 때, 동네 생활을 연재하겠단 포부로 #수색만면이란 해시태그를 정한 적 있다. 지금 보니 더없이 적절하다. 내 생은 짧고, 지구의 여명은 길고, 수색은 만면이다.




따릉이 생활
점심 시간에 김밥 사서 난지도공원으로 탈출
가장 좋아하는 길
수업을 듣는 사물과
바위가 되려는 인간
#수색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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