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비밀의 언덕>을 봤다. 어떤 평론가의 말마따나 '과거의 내가 동시상영되는 듯한 영화'였다. 1996년,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5학년 소녀 '명은'이 몇 번의 글쓰기 대회에 나가게 되는데….
2. 기억력이 매우 안 좋은 편이다. 남들보다 심하게 유년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비밀의 언덕>은 내가 삭제한 줄 알았던 유년의 디테일을 끌어낸다. 영화는 선생님에게 잘 보이고 싶은 명은이 문방구에서 정성스레 선물을 포장하며 시작한다. 그걸 보고서야 나도 '아 그땐 그랬지' 싶었다. 우리 동네 문방구 아저씨도 내게 포장지 위에 붙일 별 모양의 장식 리본을 직접 고를 수 있게 해 줬다. 꿉꿉한 먼지와 차갑고 축축한 종이 냄새가 가득하던 곳. 사십 년도 넘게 운영하던 <우리 문구>는 몇 해 전 문을 닫았다.
3. 자신이 쓴 글의 파장을 걱정하며 내복 차림으로 고민하는 작은 머리의 명은이를 보고선 어떤 새벽이 떠올랐다. 걱정이 유독 많은 날은 자다자도 눈이 번쩍 뜨였다. 아무도 깨지 않은 푸른 새벽에 혼자 깬 나. 천장만 보고 한숨을 폭 쉬던, 온 세상 크기의 고민을 하던 나. 붉은 악마 티셔츠 차림의 나. 나는 항상 나이 먹는 게 좋았다. 매해 고민을 다루는 방법을 터득하니 전보단 살만해졌다. 그런 노하우가 가장 적은 초등학생 시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치열했다. 150cm도 안 되는 어린이의 어깨에 생각이 너무 많았다. 명은이처럼.
4. 나도 명은처럼 글을 쓰는 아이였다. 환경보호의 날이든 과학의 날이든, 명은처럼 주제에 맞게 적당히 좋아할 만한 윤리적 글을 쓰고 상을 받았다. 때로는 '혜진'처럼 치부를 무기 삼아 어른들이 좋아할 만한 글을 썼다. 장애와 가난에 대해 쓰는 건 자신 있었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친구들에게 우리 집은 자동차가 없다는 걸 말하지 못했다. 언젠가 선생님이 집에 차 없는 사람 손들어 보라고 말할 적이 있다. (아이들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시대의 질문ㅎㅎ) 그때 옆옆 빌라에 사는 동훈이 딱 한 명이 손을 들었다. 그 애의 용기가 두고두고 부러웠다.
5. 유년은 대체로 질투와 질투와 질투의 시절. 나는 선생님이 좋아할 만한 학생이었으나 선생님의 관심이 나 외에 다른 애들한테 가는 걸 잘 알아차렸다. 명은이처럼 계속 선생님만 보고 있으니까... 힘 안 들이고 본판이 예쁜 애들도, 좋아하는 남자애랑 스스럼없이 친한 부반장도, 명문고 간 애(보통 셋다 동일인물)도 부러워 잠 못 잤다. 그중 가장 용심 나는 애는, 재능이 반짝반짝 빛나는 애였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순수한 열패감. 아무리 써도 쟤처럼은 못쓸 것 같아서, 그냥 좋아해 버리기로 마음먹은 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6. 에세이는 자신에 대해 쓰는 것이지만, 반대로 글을 쓰며 자신을 알아가기도 한다. 글을 쓰며 거짓말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거짓말이 진실이 되기도 한다. 내가 쓴 글 속의 내가 되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환경보호의 날에 글을 쓰고 분리수거를 더 열심히 하게 되는 명은처럼. 그런데 너무 '나'인 글은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 나의 솔직함은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니까. 여전히 나는 용기가 없다. 사과집이란 필명이 편하다. 가족은 내가 세 권의 책을 쓴 사실을 모른다. (물론 알고 있으리라 짐작은 한다.)
7. 한창 온갖 글쓰기 공모전에 헌터처럼 참여한 때가 있다. (이것도 명은 같다. 물론 나는 돈이 필요했던 것이지만...) 한식을 소재로 수필을 쓰는 거였는데, 내가 쓴 글은 '산초 된장찌개를 끓이며' 그건 아빠가 생전에 해준 음식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던 음식 여전히 절반 가량 남아있는 산초장아찌. 이걸 다 먹으면 어떡하지?라는 마음으로 쓴, 솔직하지만 그게 통하리라 알고 쓴 글. 그래서 예상대로 상도 타고 용돈도 받고 게재도 했다.
8. 이제 엄마가 아빠 대신 산초 된장찌개를 끓여준다. 문제는 엄마가 인터넷에 '산초 된장찌개'를 검색하다 내 글을 다 읽은 것이다. 본가에서 밥 먹다가 엄마랑 동생이 내 글을 읽었다는 얘기를 듣고 아무렇지 않은 척 말 돌렸지만 사실 엄청 가슴이 뛰었다. 당장 글도 내리고 흙으로 덮었다. 나중에 엄마가 전화로 "다시 인터넷에 검색했더니 니 글이 안 뜬다?" 했을 때는 명은처럼 조개같이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5학년 명은이 보다 조금도 자라지 않은 걸까...
9. 왜 나는 자신 있게 밝히지도 못할 글을 쓰는가? 그것도 필명으로. 나에게만 진실인 글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나중에야 내막을 알고 무지한 내 과거의 글을 욕한 적은 얼마나 많은가? 어차피 달라질 생각을 왜 박제를 해서 주위 사람들까지 힘들게 하나? 근데 그래도 쓴다. 쓰는 건 이유가 없다. 써야지 내가 틀렸다는 것도 안다. 틀리면 뒷장에 다시 쓰면 된다. 나도 명은도 멈출 수 없다. 때때로 웃음이 난다. 뭐 어때? 내일 다시 쓰면 돼.
10. 글쓰기 클럽을 가늘고 길게 이어오는 중. 내가 가진 미덕이 있다면, 그건 나약함의 경험. 여전히 숨어서 쓰고, 필명을 버리지 못하고, 누가 읽을까 전전긍긍하고, 재능이 넘치는 솔직한 글에 용심이 폭발하고, 소심하고, 쪼잔하고, 갑갑하고, 후지고.... 글 쓰는 동료의 마음을 아니까 이렇게 말할 뿐이다. "우선 여기서만 볼 수 있는 글을 써보자" 그건 우리의... 비밀의 언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