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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Feb 14. 2024

돌아본다고 걷는 것을 멈출 필요는 없다

회고에 대한 회고


1. 입사 후 2년 3개월 정도를 한 팀에서 보냈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도망치듯 다른 팀으로 부서 이동을 했다. 그간의 시간을 돌이켜 본다. 실패하고, 무너지고, 꺾이고… 부서 이동 전 몇 달은 완전히 무기력한 시간이었다. 결국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지 못했다. 갈수록 운신의 폭은 좁아져갔다. 여기서 있던 시간은 과연 의미가 있을까? 지난 시간을 반추하고 회고하며 그 시절의 나와 인사했어야 했는데, 떠밀리듯 걔랑 같이 새 팀에 와버렸다.


2. 그 시기에 가장 재밌게 본 일본 드라마가 있다. <콩트가 시작된다(2021)>. 20대 후반 남성 콩트 트리오 ’맥베스‘가 주인공이다. ’10년 해도 팔리지 않으면 그만두겠다‘ 라고 다짐했는데, ’맥베스‘에게 정말 약속한 그날이 다가와 버렸다. 남들 보기엔 실패한 무명 코미디언의 인생. 드라마는 그들이 꽁트를 그만두는 두 달간의 이야기다.


콩트가 시작된다


3.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지난 10년을 회고하는 드라마다. 맥베스는 고민한다. ‘10년을 해도 성공하지 못했으니, 지난 10년은 쓸모가 없는 시간인가? 앞으로의 쓸모는 어떻게 찾을 것인가?’ 계속 달리기만 하다가, 10년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멈춰서 돌이켜보는 것이다. 나의 상황과 비슷해서 감정이입이 됐다. 2년동안 하고자 하는 걸 하지 못했으니, 2년은 쓸모없는 시간인가? 새 팀에서 나의 쓸모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4. 언제부턴가 회고도 피하고 싶은 단어가 되버렸다. 내가 그걸 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따로 내어야 할 것 같고, 진지하게 각잡고 책상위에서 성찰해야할 것 같고, 일잘러들이 만든 회고 문서 양식을 채워야 할 것 같고.. 종이나 펜, 문서를 준비하는 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마음을 먹는 것이다. 내 실패를 마주할 용기. 덩그러니 나와 마주할 용기... 심지어 글을 쓰는건 더 고문이다.


5. ’맥베스‘한텐 별도의 회고 양식이 있지 않다. 그냥 남은 두달간 마지막 꽁트를 하며, 사람들을 만나고 진심으로 인사한다. ’맥배스‘의 어원이 됐던, 처음 꽁트를 권유한 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을 만나 꽁트를 계속 할지 묻는다. 한편 부모님 집에 가 가업을 슬슬 물려받을 준비도 한다. 극소수지만 팬도 만난다. 그렇게 나의 10년을 함께해준 사람들을 만나 인사한다.


6. 그런 의례와 의식이 지난 시간에 서사를 부여해준다. 실패의 역사지만 타인의 관점에서 보니 긍정할 지점도 있다. 내 10년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주변과 사회 속에서 해석된다. 나중에 인생을 돌이켜 봤을때 한심한 꽁트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게 뭐 어때? 나쁠 것 없다. 맥베스는 그렇게 남은 두달 간 열심히 꽁트를 한다. 이게 마지막인지 알고 하는 꽁트는 전과 같을 수 없다. 어떤 경험은 꽁트의 소재가 된다. 또다른 꽁트가 시작된다.






7. <꽁트가 시작된다>의 ‘맥베스’가 알려준 것은, 회고란 그저 그날 그날을 열심히 사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돌아보는 데 집착해서 걷는 것은 멈출 필요는 없다. 살아낸 흔적은 내 몸에 남아 있다. 암묵지로, 습관으로, 육감으로... 포장마차에서 술 한잔 하며 하루치의 노고를 쏟아내는 직장인들처럼. 상사를 욕하기도 하고, 은근히 내 자랑도 뽐낸다. 허심탄회하게 털어놓고 대화하며 어떤 암묵지는 언어화되어 더 오래 기억된다. ‘맥베스’가 보여준 것은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고 하루하루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이미 잘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10년간 몸에 누적된 것들이 살아가며 계속 튀어나와 나를 돕겠지.


8. 과거를 분석하고 싶은 이유는 미래를 잘 살기 위해서다. 점술도, 분석심리학도, 자기계발서도 그렇다. 진정한 내 모습을 파악하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 앞으로는 그 법칙대로만 살아가면 된다. 사주오행의 원리에 따라, 또는 내 무의식에 억압된 가족과의 관계를 분석함으로써. 자아에 대한 확실한(또는 화끈한) 진단과 단정적인 결론에 우리는 안심한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는 이걸 비판한 철학자다. (지바 마사야의 <현대사상입문>에서 읽었다) 이 사람들이 보기에 ‘진정한 나의 본모습’는 탐구할 필요가 없다. 정해진 분석틀에 자신을 맡기지 말고 다양한 관계 속에서 여러가지 도전을 하며 준안정 상태를 만들어가야 한다. ”여러가지를 하다보면 어떻게든 될것이다. 이는 모종의 예술적, 준예술적 실천이다“


9. ‘이키가이’라는 개념이 있다. 일본어로 인생의 즐거움과 보람이라고 한다. 최근에 일을 회고하는 용도로 이키가이 다이어그램을 활용하는 사람들이 늘었다. 다이어그램은 네 개의 원이 서로 겹쳐 있다. (1) 내가 좋아하는 것 (2) 내가 잘하는 것 (3) 돈을 벌 수 있는 것 (4)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 각 원이 겹치는 지점에 따라 ‘열정’, ‘직업, ’천직‘, ’사명‘이 다르다. 항목항목에 답하다보면 내 존재이유를 찾을 수 있다는 궁극의 다이어그램이다. 작년 한창 무기력했을 때 나도 직접 그려본 적 있다. 그리면서 어떤 갈증이 들었다. 이 원에 포함되지 않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나의 모습이 궁금해…


이키가이


10. 원을 쪼개고 구체화하기 전에, 우선 원을 더 키워볼 수 있지 않을까?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상하며, 그냥 살아보는 것.. 어쩌면 내 무기력의 이유도 여기서부터 출발했을 수 있다. 당분간은 그저 원을 넓히는 것에 집중하자란 생각으로 새로운 팀에 온지 두달이 흘렀다. 회고할 시간도 없이 바쁘게 흘러갔다. 각잡고 회고하지 않아도 이 경험이 내게 남아있다는 확신도 있다.


11. 그래도! 때가 되면 회고를 하고 싶다. 불안 때문이다. 결국 그게 전부다. 살아가는 건 평생 이 불안을 어떻게 견디고 사느냐의 문제겠지… 그저 열심히 살다가, 불안이 너무 쌓일 때 돌아볼 것. 맥베스처럼 주변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남의 회고를 읽는 것 만으로도 좋다. 그가 불안을 다스리는 방식을 읽는 것 만으로 내 불안도 일부 사그라든다.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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