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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과집 Feb 19. 2024

종이에 먼저 쓰는 이유

로베르트 발저의 '연필 체계'


1. 얼마전 로베르트 발저의 책 <연필로 쓴 작은 글씨>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사실 이 책에 대해서 가장 인상깊은 점은 이 책이 쓰여진 방식이다. 책은 제목처럼 발저가 ‘연필로 쓴 작은 글씨’를 모은 종이(=마이크로그램. 책의 원제이기도 하다)를 사후에 편집해서 낸 것이다. 그가 요양원에서 산책을 하다 죽은 후, 발저의 방에 남겨진 원고와 인쇄 자료들은 아마도 그의 누나인 리자 발저를 거쳐 발저의 최초의 편집인이자 후견인이 된 카를 젤리히의 손에 들어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2. 원래 발저는 지극히 잘 다듬어진 필체를 구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작가로서의 생존이 의문시되던 시기부터 ‘연필 체계’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연필 체계는 두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1단계에서는 연필로 초안이 작성되고, 2단계에서는 펜으로 정서하는 작업이 이뤄진다. 1단계에서는 “연필로 긁적이기, 그려넣기, 잡다한 일하기”를 하며 사적으로 글을 쓴다면, 2단계에서는 일종의 자체적인 검열과 수정이 일어난다. 발저는 이러한 연필체계를 통해 그의 “작가적 욕망”이 다시 되살아났다고 말한다.


3. 나도 이러한 이중 쓰기의 방식으로 쓴다. 먼저 노트에 만년필로 아무런 주저함 없이 쓰고 싶은 것들을 죽죽 써내려간다. 이 때의 쓰기는 아주 사적이고 난잡하고 혼란스러워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에 부끄럽다. 만년필은 지난 연말에 전 팀장님에게 받은, 이름이 각인된 노란 라미 만년필이다. 슥슥 쓰이는 소리와 감촉이 마음에 들어서 계속 쓰고 있다. 2단계에서는 컴퓨터로 필타한다. 이때 나름의 구조화를 하며 편집하고 사적인 이야기를 걷어낸다. 이때 유념하는 것은 나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게 쓴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적인 쓰기와 공적인 쓰기의 분리가 일어난다.


요즘 쓰는 노트


4. 최근에 받은 피드백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편협한 이달의 케이팝’을 연재하고 있는 일석의 말이었다. 편이케가 너무 재미있어서 메일에 답장을 했더니, 일석도 나의 글을 공감하면서 읽고 있다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우리의 사회적 경제적 기타 등등적 배경이 다를 텐데도 왠지 과집의 글에서는 ‘내’가 읽힌다” 이 메일을 보고 너무 기뻤는데 내가 바라던게 이런 거구나 하고 명확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다른 사람에게 공감가는 글을 쓰기 위해 나의 디테일을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대로 구체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쓰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거기서 공적인 글쓰기가 시작되는 것 같다.


5. 연필 체계와 이중쓰기는 이러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번역을 용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장점이 있다. 발저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을 ‘흘러가도록 놔둘 수’ 있고, 프랑스의 시인 앙리 마쇼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나를 돌아다니기 위해 글을 쓸’수 있다. 앙리 마쇼의 말은 어제 어쩌다 책방에서 산 조르주 페렉의 <공간의 종류들>에서 발췌했다. <공간의 종류들>에서 페렉이 가장 먼저 말하는 공간은 어디일까? 다름아닌 ‘페이지’다.


6. 종이도 공간이다. 우리는 그 위에 글자를 적어내려가며 공간감을 느낀다. 나는 종이 위를 돌아다닌다. 아무것도 없는 빈 종이 위에 ‘기호가 생기고, 위와 아래가 생기고, 시작과 끝, 오른쪽과 왼쪽, 앞면과 뒷면’이 생긴다. 무엇보다, ‘공백들’이 생기고 ‘간격들’이 생긴다. 조르주 페렉은 이 ‘간격들’ 뒤에 괄호를 붙인다. ‘간격들 (의미상의 튀어오름들 : 불연속성, 변화, 전이)’. 튀어오름이 핵심이다. 글씨가 쓰여지지 않은 여백을 나는 뛰어다닐 수 있다. 거기서 어떤 단어와 단어는 예상치 못하게 조우한다. 튀어오른다. 새로운 의미가 발생한다. 그렇게 쌓인 텍스트는 나를 파악하는 지리학이다.


7. 발저의 마이크로그램은 말과 그림의 하이브리드다. 그것은 시각적이고, 그래픽의 영역이기도 하다. 거기엔 메인 영역이 있고 가장자리의 영역이 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밀려난 것인지 우리는 시각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그래서 종이에 글을 쓸 때, 우리는 의식적으로 밀려난 자리나 비워진 자리를 선택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의 배열과 여백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비선형적인 방식으로 페이지 안을 돌아다니며 튀어오르기.


8. <공간의 종류들>엔 오른쪽 여백에 쓰인 글씨가 하나 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져 있다. ‘나는 가장자리에 쓴다...’ 의식적으로 가장자리, 소외된 곳, 여백을 선택할 수도 있다. 영어로는 마진(margin)이다. 책 여백에 끄적이며 메모하는 행위를 마지널리아(marginalia)라고 하고, 그런 습관이 있는 사람을 마지널리안이라고 한다. 10년 전에 만든 나의 첫 인스타그램 아이디다.


조르주 페렉, <공간의 종류들>


9. 아무튼 발저는 이런 마이크로그램이 자신을 해방시켰다고 말한다. 숨겨진 곳에서 자유롭게 초안하고, 나중에는 베껴쓰면서 ‘자기 자신에 대한 편집인으로 텍스트를 관리’하고, 점점 어려워지는 출판 가능성 때문에 상실해갔던 ‘글쓰기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되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10. 요즘에 다시 사부작 글을 올리기 시작한 나도 그러한 ‘자율성’과 ‘독립성’의 기쁨을 느끼고 있다. 글을 써서 뭘 해보겠다는 마음에서 벗어나서... 그냥 글쓰기 자체의 재미를 오랜만에 느낀다는 말이다. 무엇이 즐거운가. 내가 겪고 보고 느낀 것을 남김없이 소화시켰다는 생각이 들 때. 모든 시간을 까먹더라도 글을 쓰며 느낀 꺠달음과 사유는 잊지 않을거란 생각이 들 때. 종잇장 속을 헤메며 마주한 나를 다시 통제하고 편집하고 관리한다는 자율적인 감각. 그걸 어디든 올릴 수 있다는 해방감. 나의 생각을 누군가와 공유하고 나눌 수 있을 때.


11. 발저의 말처럼, 이중 쓰기라는 우회는 ‘더 많은 노력’을 요구하지만 ‘독특한 행복’을 준다.

 나는 나를 돌아다닐 수 있다.

 나는 제대로 헤멜 수 있다.






김영민 교수의 ‘자화상’이란 최근 칼럼의 문장을 공유해봄


“모든 자기표현이 다 이렇지 않을까.

표현해야 할 자신이 어딘가에 존재하고,

그것을 옮겨적는 것이 자기표현이 아니다.

자신을 표현하려는 과정에서 창조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아다.

일기도 그렇지 않은가.

단순히 자기 마음속을 옮겨 적는 것이

일기 쓰기가 아니다.

뭔가를 적어 나가는 과정에서

자기 마음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일기 쓰기다.

그 과정에서 비로소 자아가 탄생한다.

사랑을 찾지 않으면 사랑이 없듯이,

자아를 찾지 않으면 자아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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