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20년 만기 상품에 가입했었다. 15년 동안 일정 금액을 납입하고 5년 동안 거치하는 상품이었는데, 재테크에 별 관심 없던 내가 20년이나 기다려야 하는 적금에 가입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머리 희끗한 중년이 되었을 때 노란색 포르쉐 911을 타자!
생각해 보면, 내 드림카 리스트에 올랐던 차들은 비교적 현실적(?)이었다. 크라이슬러 PT 크루저로 시작해, 페라리 F355, 사브 9-3 컨버터블, 포르쉐 911로 이어졌는데, 일부 차들은 조금만 무리하면 당장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구매를 위해 계획적으로 돈을 모은 건 911이 처음이었다.
10년 가까이 열심히 월급을 납입했다. 급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도로를 질주하거나 트랙 위를 달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고, 그저 저 이름다운 라인의 차를 소유할 날을 기다릴 뿐이었다.
결국 만기를 채우지는 못 했다. 결혼하며 목돈이 필요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모았다'라고 표현할만한 상품이라곤 그 포르쉐 적금이 유일했다. 천천히 다가오던 포르쉐는 우렁찬 엔진소리와 민첩한 코너링 대신 조용하고 안락한 집의 일부가 되어 주었다.
그렇게 포르쉐 911은 나의 드림카 리스트에서 사라졌다. 이상하게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다른 워너비들처럼 막연한 존재로 들어왔다 사라졌다. 이제는 특정한 모델이 갖고 싶어!, 하는 마음보다 은퇴할 때 즈음 예쁜 컨버터블 하나 정도만 소유해보고 싶다는 바람이다.
어느 주말, 아내와 학교로 가는 길에 쇼핑몰에 점심 먹으러 들렀더니 인근에서 온갖 포르쉐를 길거리에 전시했다. 미술관인 듯, 박물관인 듯, 담담하게 그저 작품 마냥 수백 대의 포르쉐를 찬찬히 스쳐 지나갔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혼신의 힘을 다해 내 사진을 예쁘게 찍어줬다.
정지선에 서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포르쉐 911이 앞을 지나갔다. "역시, 노란색은 포르쉐 911이 제일 예뻐. 나는 람보르기니도 노란색은 별로야"라고 했더니, 아내는 "우리 그냥 한 대 질러?" 한다. 정신 차려, 지금 저 차 사면 우리 생활비 엄청 쪼들려! 음... 그럼 나중에 살까? 불을 다시 지른 건 여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