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혼자인 나와 아빠가 되어있을 너에게
어느 날 밀린 겨울 이불빨래를 하고 엄마랑 동네 카페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그때 걔는 뭐 하고 살까?
라는 질문이 툭 튀어나왔다.
그러게, 그때 그 시절의 전남친들은 뭐 하고 살까?
누구보다 화려한 시절의 연애를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눈물 나오는 신파도 아니었다.
나의 연애는 그냥 그때의 어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연애였다. 그때에는 세상에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 같고, 나만 사랑받고 사는 것 같고, 우리가 주인공 같았다. 나는 남자친구들과 비슷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했고, 그들 앞에서 멋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싫은 것도 좋은 척하기도 하고, 귀찮고 번거롭게 여기저기에서 그를 기다리고,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잡채를 생일날 해주기도 했다. 그때는 그랬었다.
그래서, 지금 그는 뭐 하고 살지?
누구에게나 인생의 사랑이 있듯이 나도 마찬가지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 사람을 만날 거고, 나는 똑같은 행동을 하고 똑같이 연애하고 똑같이 최선을 다해서 사랑할 그 사람. 그는 지금 생각해도 멋진 사람이었다.
그와 나는 같은 지역의 대학생이었어서 이 학교 저 학교 다니면서 열심히 데이트하고, 시험 기간에는 서로의 학교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기도 했다. 물론 절대로 집중이 되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생활공간에 내가 들어간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설레었다. 영어신문을 자연스럽게 읽고, 공대생이었으면서도 경영이나 경제 지식에 해박했다. 학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멋진 옷을 챙겨 입었고, 함께 패션잡지를 보고, 쇼핑도 함께 다녔다. 서울에 있는 유명한 식당을 다니면서 가끔 미술관도 가고, 음악회도 갔었다. 마치 이것이 진짜 어른들의 세련된 연애 같았다.
그는 내가 지금 다시 만나 연애한다고 해도 하고 싶은 그런 사람이었다.
우리는 2년 정도 만났었고, 심지어 그는 나의 외국 교환학생의 길에도 함께 따라가 주었고, 낯선 나라에서 은행계좌를 만들고, 자동차를 렌트하고, 바닷가도 놀러 가고, 심지어 용돈도 보내주던 사람이었다. 교환학생의 기간이 끝나고 우리는 자연스럽게 결혼을 생각했었다.
그때는 그게 우리의 사랑의 결론일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 남자와 결혼을 해야 나도 편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 결혼은 쉽지 않았고, 그의 가족의 반대로 울며불며 헤어지게 되었다. 헤어짐의 과정에서 온갖 질척거리는 미련을 나는 가감 없이 표현했고, 그도 우유부단한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그와의 헤어짐 이후 나는 한 학기를 휴학까지 했었다. (그때에는 그런 정도의 열정적이 사랑이 가능했다는 것에 나도 너무 놀랍다.)
그래서 걔는 지금 뭐 하고 살까?
검색 한번 해볼까?
나는 그가 유학을 가서 분야의 학위를 따거나 벤처투자기업을 만들어서 젊은 테크 기업에 그가 겪은 경영환경을 제시하고 투자하는 업을 하지 않을까 상상했었다. 그의 똑똑한 머리와 안정적인 가정, 부모의 경제적 뒷받침으로 나는 그가 구글에 이름을 검색하면 숱 많은 검은 머리를 반짝하게 다듬고 밝게 웃는 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레이 컬러 팬츠에 브라운 스웨이드 로퍼를 신고, 연한 블루 재킷을 입은 모습이 내가 상상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 사람의 이름을 구글 검색창에 검색했다.
그 십 년도 더 전의 얼굴이 어떤 플랫폼 프로필에 게시되어 있었다. 업데이트는 없었다.
자동차부품 무역회사에 걸려있는 그의 이름 다음 페이지에는 답십리 자동차 부품 시장 사진이 있고, 1톤 용달트럭 사진이 있었다. 회사의 위치는 우리가 가을에 열리는 감을 보던 그의 부모님 집으로 되어 있었다.
뭐지?
아쉬웠다.
나는 그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나와 헤어지고 얼마 있다가 부모님이 알아봐 준 사람과 결혼을 했다. 그녀가 선생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고, 아마 지금쯤은 자녀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의 사진은 나와 함께 지내던 시절의 사진에서 변함이 없었고, 그의 회사의 정보도 이름과 업태만 나와 있는 수준이었다.
헤어지고 육 개월 정도 후에,
함께 아는 친구를 통해서 그가 선을 봤고 곧 결혼을 하며, 예비신부는 선생님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슴이 배로 내려앉는 묵직한 하강을 느꼈다. 그리고 일 년 후쯤, 영화 리뷰하는 플랫폼에서 연한 파스텔컬러의 한복을 입은 그와 그녀의 사진을 봤을 때는 가슴이 갈비뼈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지금 회사를 만들어 운영하는 걸 보니, 가족을 꾸리고 잘 살고 있구나 싶은 마음에 몸 전체가 아련하고 따뜻하다.
그 시절이 주는 설렘이 있다.
앞 일을 모르고 이 사람이 나와 미래를 함께 할 딱 그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의 순진한 생각과 나 잘난 맛에 내 말만 옳고 상황에 이끌려 결정하는 너를 바보 같다고 욕하던 순간의 철없던 시절이 있다.
그때 당시에는 억울하게 끝난 사랑이 서러웠지만 지금은 변해버린 나의 모습과 변해버린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 시절이 이미 한참 전에 지나갔다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