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함익>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 글의 제목을 보고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역시나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아닐까 싶다. 그 제목을 빌려 이 연극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이 글을 읽다 보면 그것과의 연관성을 찾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오랜 시간 논의되어 온 죽음을 자꾸만 새로운 관점으로 보려 하는 것은 그것에 다가가는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치열한가를 반증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두 명의 익, 두 명의 햄릿
연극의 주인공은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가는 '익'이다. 그것도 두 명의 익이다. 이 사실은 연극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두 명의 익과 햄릿(햄릿과 햄릿의 한글 표기로 추정되는 '함익')이 존재한다는 것. '익'의 또 다른 자아는 환각 상태에서 드러나며 현실에 있는 익의 페르소나 역할을 한다. 햄릿은 연극에서 등장하는 두 인물의 이름이 같은 것일 뿐이지만 한 명은 익이 사랑하는 존재, 한 명은 익이 죽이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서로가 서로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겠다.
연극의 흐름은 현실의 '익'의 시선을 따라간다. 연극부에서 하는 공연 '햄릿'에서 단역을 맡고 있는 학생, '함익'이 가지고 있는 비극에 대한 견해에 사로잡힌 '익'은 그를 사랑하게 되고 그에 대한 집착은 결국 교수로서의 자신의 지위뿐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파멸로 몰고 간다. 그와 더불어 그녀는 동명의 '햄릿'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이 가정에서 가지는 먼지 같은 지위마저 파괴해버린다. 자신을 끝까지 내몰고 간 그녀가 선택한 것은 결국 자신이 그토록 의존해왔던 또 다른 '익'과의 만남, 그리고 죽음이다.
이번엔 앞에서 밝힌 극적 요소들을 가능하면 밝히지 않으려 한다. 가령 동명의 햄릿을 죽임으로써 그녀가 얻게 되는 내적 효과가 무엇인지, 환각 상태의 그녀가 또 다른 자신과 하는 대화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등의 사실 말이다. 이것들이 어떤 효과를 냈는지를 일일이 밝혀내는 것이 아닌 그것들이 가리키는 최종적인 결과, 그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어떤 방향의 해석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를 하고자 한다. 내가 나를 파괴할 수 있다는 건 비극일까 희극일까.
죽음의 비극을 승화시키는 희망의 단서
두 명의 익, 두 명의 햄릿, 자신의 우상이자 선망이었던 그것을 죽이고 자신마저 죽어야 끝나는 이 비극의 문제는 담담해서 아름다운 한 배우가 있기에 더욱 돋보인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비극적인 사실 앞에서 아이러니하게도 진짜 비극은 익이 죽기 전에 모두 나타난다. 오히려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보이는 건 그 자체에 대한 슬픔과 비극이 아니다.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나가고 그것을 선택해 앞으로 나아가는 그녀를 통해 보는 희극뿐이다.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죽음, 주변의 관계, 사랑, 가족 등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끝내버린 그녀는 연극 내내 신고 있던 구두에서 그제야 내려온다. 그리고 구두에서 내려온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은 항상 자신이 내려다봤던 또 다른 익의 얼굴이다. 그리고 그렇게 마주한 두 명의 익은 이제 어떠한 권위도 무게도 없이 눈을 맞추고 손을 맞잡는다. 죽음을 통해서야 비로소 거부하면서도 자꾸만 찾았던 자신의 페르소나를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배우의 몸은 연극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변모한다. 이전엔 연극 속 자신의 역할을 통해 인물의 성격이 결정됐다면 구두에서 내려온 후엔 그 이후의 삶, 극본이 알려주지 않은 삶을 배우의 몸을 통해 짐작하게만 하기에 그것이 더욱 중요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마지막을 걸어가는 '익', 그리고 그 옆으로 스쳐가는, 스러져가는 인물들. 최종 목적지일 것만 같았던 햄릿마저 스러져가고 그녀 앞에 남은 건 그저 손을 마주 잡은 또 다른 나뿐이다. 누구에게 의지하지도 선망하지도 않으면서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일련의 희망, 즉 희극으로 보인다. 스스로를 파괴한 후 남는 것은 오롯한 나, 그것만으로도 더 나은 미래를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은 '햄릿'이라는 비극을 '희극'으로 바꿔내는 마법을 보여준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에 대한 대답,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