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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지은 Jean Oct 21. 2024

최악의 영화 리뷰는 이렇게 탄생한답니다

굴러온 눈덩이를 제가 어쩌겠어요


영화 기자로서 악플을 가장 많이 받는 경우는 당연히 영화 리뷰를 쓸 때다.


영화의 감상은 누구에게든 주관적이다. 하지만 기자만큼은 어떻게 써도 욕을 먹는다. 좋은 평을 쓰면 '난 재미없었는데 너 뒷돈 받고 쓰냐'고 욕먹고, 안 좋은 평을 쓰면 '나는 재밌었는데 네가 왜 재미없다고 하냐'라던가 '안 그래도 힘든 영화계에 똥물을 끼얹냐'고 욕을 먹는다. 일상이다.


사과해요 나한테


예외적으로 이런 경우의 사람들도 있다. 각자 응원하는 배우가 나온 영화라던가, 좋아하는 원작이 영화화된 케이스의 작품이면 기자에게 무조건적으로 호평 리뷰를 요구한다. 만약 원하지 않는 반응이 리뷰로 뜬다면 그때부터 메일, 혹은 DM으로 메시지를 보내야 성이 풀리는 분들이 계신다.


어떤 의미로는 감사하다. 내 리뷰가 그렇게 영향력이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 적 없으나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여겨 악플까지 달아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일지도. 하지만 그런 분들을 위해 내가 왜 혹평을 쓰는지 이유 정도는 설명하고 싶다.


업계 관계자를 만날 때 나는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줄곧 설산의 눈사태비유한다. 먼저, 모든 창작물은 말 그대로 감독 혹은 작가의 창의성에서 시작한다. 바로 시나리오라는 작은 눈 뭉치다.


시나리오가 나오고 인맥 혹은 발굴에 의한 소개, 계약, 캐스팅 여부, 투자 등등이 이뤄지는데 이 과정에서 간섭을 하는 대상이 제작사가 될 수도, 감독이 될 수도, 투자사가 될 수도 있다. 여러 업계 관계자 미팅에서 온갖 이야기를 다 들어선 지 사실 이건 누구의 탓이라고 꼭 지적할 수 없고 상황마다 다르다는 말이 그나마 맞는 것 같다.


그 과정이 잘 풀리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사공이 많은 배를 탄 영화가 결국 망작의 결과물로 나올 때도 있다. 그러면 모든 문제는 그 망작이라는 눈뭉치가 굴러감으로부터 시작된다.  



내가 보기 싫은 영화를 남들에게 보라고 종용하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나는 배급사 홍보팀과 홍보사 분들을 영화 업계에서 가장 존경한다.


굴러오다 굵어진 눈덩어리를 받아 든 홍보사는 썩 유쾌하진 않아도 최선을 다한다. 홍보가 잘 돼야 다음 작품도 계약을 할 수 있으니 일하는 모습에서도 그 갈망이 느껴진다. 프로페셔널한 사람들이니 당연히 기사에 대해 최대한 장점을 부각한 보도자료를 내보내고 영화를 홍보할 수 있는 프레스 키트를 꾸린다.


품이 많이 드는 일이란 일은 전부 다 한다. 이 과정에서 구시대에서 온 갑질을 시전 하는 몇몇의 기자들 때문에 눈치도 살펴야 한다. 가끔 썰들을 들어보면 2024년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가관인 케이스도 있다.


이 과정이 지나 이제는 커질 대로 커진 눈덩어리가 기자들을 덮친다. 언론시사회의 분위기는 대부분 도서관 급이다. 잘 웃지도, 울지도 않으며 어둠 속에서 평을 적는, 사각거리는 펜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극장에서 나오는 순간 망작에 대한 평가들이 입에서 터져 나온다.


이때부터가 딜레마의 시작이다. 아틀라스의 형벌을 받는 기분이랄까. 신화 내용처럼 누구 편을 들기도 애매한 상황에 대한 벌로 눈덩이를 떠받들고 있는 것만 같다.



대충 기자들 감상을 들어보면 이 영화가 잘 될지, 안 될지가 보인다. 하지만 과연 이 망작을 그대로 혹독하게 쓸 것이냐, 혹은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지닌 홍보사분들의 노력에 적어도 좋은 말 한마디 정도는 써야 할 것이냐. 고민의 기로에 놓인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 눈빛을 외면하는 쪽에 가깝다. 극장 입구 앞에서 홍보사 분들이 포진해 기자들에게 다가가 감상평을 묻곤 하는데 나는 그분들을 피하는 것에 진심인 사람이다. 거의 닌자술을 쓰기도 한다.


그만큼 내가 거짓말을 못해서다. 그 반짝이는 눈을 마주 보고 거짓말할 용기가 없다.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라 미워할 용기가 없다. 가끔 내가 봐도 "와, 이건 좀 독했네"라고 반성하는 리뷰를 써야 할 작품을 본 직후가  그렇다.


모든 영화가 그런 것이 아니라 소수의 영화를 정말 집요할 정도로 물어뜯을 때가 있는데 그것은 이딴 영화를 만들 투자금을 불우이웃 돕기에 써야 좀 더 나은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영화들의 경우다. 영화라고 부르기도 싫은 그런 (?)들은 매년 연말에 특집 기사로 강조해서 한 번 더 쓴다. 괘씸죄라는 판단 하에서다.



문제는, 최종적으로 영화를 선택하고 돈을 내는 대중은 이 모든 과정을 정확하고 세세히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모든 리뷰에는 악플이 달릴 수밖에 없다. 좋은 사람들이 애써 좋게 만들었을진 몰라도 좋은 영화는 아니었으니까. 당연하다.


그렇게 대중은 눈사태를 온몸으로 맞는다.


하소연을 해봤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다. 그저 각자 할 일을 잘하면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감독은 영화를 잘 만들면 되고, 투자자는 좋은 시나리오의 가치를 잘 알아보고 투자하면 되고, 제작사는 제작을 차질 없이 잘하면 되고, 배급사는 상영관 지켜 배급을 잘하면 되고, 홍보사는 맛깔나게 홍보를 잘하면 되고, 기자는 솔직하고 공정하게 쓰면 된다. 이게 끝이다. 각자 자기 역할만 잘하면 좋은 결과물이 나온다.


물론 이건 너무 이상적인 말이라는 것을 안다. 벌써부터 가족오락관 '고요 속의 외침' 게임처럼, 정답을 아무리 외쳐도 헤드폰에서 울리는 잡음으로 점점 괴작이 되어버린 오답이 대중에게 전달되는 모습이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보며 또 똑같은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내년도, 아마 내후년에도?


그래도 말은 하고 싶었다. "왜 눈덩이를 그렇게 굴리셨어요? 눈덩이만 잘 만드셨어도 저희가 이렇게 눈사태를 맞진 않았잖아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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