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난세亂世를 맞아 난세를 돌아보다
임진왜란을 생각하다
2022년은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한지 430년이 되는 해이다.
임란壬亂 이후 진행된 명·청明淸의 교체에서 볼 수 있듯이 임진왜란은 중화주의中華主義 사상에 입각한 사대자소事大字小 체계의 한계가 드러나면서, 마침 전국시대戰國時代를 마감하고 국토를 통일한 일본이 동북아에서 새로운 힘의 한 축으로 등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동북아 국제 패권 질서의 재편성’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건국 후 200여 년에 달하는 평화로운 시대를 구가하던 조선은 척신정치戚臣政治와 동서분당東西分黨의 난맥상으로 인해 국정의 추진력을 잃어가던 중, 1592년에 15만이 넘는 일본 정규군의 침략을 맞자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국가의 존망을 우려하는 지경이 되었다. 바다에서 이순신李舜臣의 분전과 조선 조정의 외교적 노력의 결과로 명군明軍이 참전한 후 전황은 잠시 안정되었으나, 명과 일본 사이에 지리한 강화협상이 시작되었다.
자체적으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던 조선 조정은 협상 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되었고, 조선의 백성들은 북에서는 명군의 식량을 조달하고 남에서는 일본군의 왜성倭城을 쌓으며 세월을 보내야 했다. 명과 일본의 동상이몽이 4년여 만에 파탄에 이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을 일으켰고 결국 조선 땅은 살육과 약탈의 지옥도地獄圖가 되었다.
2022년 기획전을 준비하다
전쟁기념관은 2022년 기획전을 통하여 누구나 알고 있는 임진왜란의 잘 알려지지 않은 모습을 조명하려 하였다. 잔인한 일본군의 침략과 무능한 조선 조정의 대응이 대비되고, 3대 대첩의 승리와 무패의 영웅 이순신으로 대표되는 일반적인 임진왜란의 서사 구조에서 놓치고 있는 전쟁의 이면과 인물의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려고 하였다.
박물관은 ‘기억의 장소’이다. 박물관은 - 그 다채로운 소장품의 범위만큼이나 - 다양한 종류와 역할을 가지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유물이 가지는 역사성을 통해 기억을 소환하거나 오브제objet에 부여한 상징성을 통해 기억을 창출한다. 따라서 전쟁을 주제로 하는 전쟁·군사박물관들은 전쟁사戰爭史·군사사軍事史적 관점에서 가치가 있는 유물을 수집하고 이에 대한 기억을 발굴하여 전시와 교육을 통해 대중들에게 소개한다.
이와 같이 전쟁·군사박물관의 역할은 전쟁의 기억을 오늘에 되살려 관람객들이 전쟁의 본질과 평화의 가치를 이해하고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있다.* 전쟁기념관 역시 그 설립 목적을 <전쟁기념사업회법 제1조>에서 “전쟁에 관한 자료를 수집·보존하고, 전쟁의 교훈을 통하여 전쟁의 예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이룩하는데 이바지하게 함”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 김정현·신규환·김지훈·하세봉, 2014, 『기억의 정치공간 – 박물관을 통해 본 동아시아 역사
교육과 민주주의』, p.13.
** 『전쟁기념사업회법[1988 제정, 1989 시행]』, 제1조(목적).
그렇다면 임진왜란 430주년을 맞아 전쟁·군사박물관으로 분류되는 전쟁기념관은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어떠한 기억을 오늘에 소환하여야 하는가?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정보통신 기술의 융합으로 제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이로 인해 인공지능, 빅데이터, 사이버물리시스템cyber physics system, CPS이 삶의 근간을 이루는 21세기 초연결사회hyper-connected society에 사는 우리는 각궁角弓과 화포火砲가 왜검倭劍과 조총鳥銃과 대결하던 16세기의 전쟁 이야기로부터 어떠한 시사점을 찾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난세에 임하다
지난 20세기에는 세계 양차 대전을 거치며 식민지들이 독립하였고 이로 인해 제국주의의가 해체되고 이후 반세기에 걸쳐 냉전체제가 유지되었다. 1990년대 전후로 냉전체제가 급속히 종식되자 군사통신망으로 개발되었던 인터넷의 민간화·보편화가 이루어졌고 월드 와이드 웹World Wide Web, WWW은 우리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렇게 세계화Globalization의 새로운 바람이 불었고, 인구와 물류의 이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세계는 문자 그대로 지구촌이 되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을 필두로 하는 냉전진영 사이의 핵 군비 경쟁이 잦아들자, 걸프전, 아프가니스탄 전쟁, 테러와의 전쟁 등 국지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양극화bipolarization 또는 다극화multipolarization 현상이 발생하여, 세계적으로 국가 간의 통합과 국가 내부의 분열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유로Euro화가 법정통화로 출범한 이후 유럽의 통합이 공고화되어가던 과정에서, 영국은 2016년 국민투표를 통해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하였고 2020년에 정식으로 탈퇴하였다. 한편, 스코틀랜드Scotland와 카탈루냐Cataluña 지방정부는 각각 영국과 스페인에서 분리·독립하여 독자적으로 유럽연합에 가입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한국, 중국, 일본, 즉 동북아 3국의 정세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냉전체제에서는 주로 양 진영 내부에서 교역과 교류가 이루어졌으나, 탈냉전 이후 진영의 구분이 사라지자 ‘동북아 3국’이라는 새로운 경제 벨트가 생겨나 역내 무역과 교류가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예를 들어 한중간 교역 규모는 1992년 약 64억 미 달러에서 2021년 약 3천억 미 달러 이상으로 국교 수교 후 30년간 47배 가량 증가하였다. 또한 2021년 한일간 교역 규모는 846억 미 달러로, 중일간의 교역 규모까지 고려한다면 동북아 3국의 경제 규모와 그 영향력은 세계적으로도 손꼽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동북아의 경제적 교류와 상호 의존도가 높아지는 경향과는 반대로 한중일 삼국간의 정치적 관계는 일본의 우경화와 중국의 민족주의화가 심화되면서 오히려 갈등이 증폭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연합군최고사령부SCAP/GHQ의 통치 아래 일시적으로 전범의 처벌과 민주화 과정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체결로 주권이 회복되고 6·25전쟁의 발발로 인해 냉전구도에서 일본의 군사·지정학적 가치가 부각되자 전쟁에 책임이 있는 일본군과 정계 인사들이 사회 지도층으로 복귀하였다. 더욱이 보수주의 정당인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은 1955년 창당 이후 거의 지속적으로 정권을 유지하면서 주변 국가에 대한 식민통치와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기조를 유지했다.
특히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의 임기 중에는 우경화 추세가 더욱 강화되어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전 총리가 일본의 식민지배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죄를 한 <무라야마 담화村山談話>의 정신이 부정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 결과 일제 강제동원 및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책임인정 및 배상의 문제는 핵심소재 수출규제와 불매운동과 같은 한일 양국간 ‘경제전쟁’으로 비화되었다.
1946년 연합군최고사령부는 전범국가로서 일본의 책임을 묻고 재무장을 방지하기 위해 <대일본제국헌법大日本帝國憲法>을 폐지하고 <일본국헌법日本國憲法>으로 개정을 추진하였다. 신헌법은 소위 ‘평화헌법’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일본국헌법 제9조>에 ‘전쟁의 포기戦争の放棄’, ‘전력의 포기戦力の不保持’ 및 ‘교전권의 불인정交戦権の否認’ 항목이 명시되어 일본의 전쟁 재도발 가능성을 방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12년 총선에서 재집권한 아베 전 총리가 일본의 ‘보통국가화普通國家化’를 다시 주장한 이래,* 일본 자민당 정권은 자국의 보호를 위한 ‘자위권’은 물론 타국의 방어를 위해 파병이 가능한 ‘집단적 자위권collective self-defence’을 행사할 수 있도록 개헌 시도를 계속해 오고 있다.
* 일본 정계에서 ‘보통국가론普通國家論’을 최초로 제기한 것은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로서,
1993년 저서 『일본개조계획日本改造計画』에서 탈냉전기에 요시다吉田독트린이 가지는
한계를 지적하고, 경제적 위상에 맞는 일본의 새로운 안보 역할을 주장하였다.
김태효·박중현, 2020, 「일본은 보통국가인가?: 군사력 수준과 무력행사 범위의 고찰」,
『국제관계연구』 25(2), p.145 참조.
한편, 건국 이후 몸을 낮춘 채 도광양회韜光養晦*를 지향하던 덩샤오핑鄧小平과 장쩌민江澤民 주석主席의 중국은 21세기 후진타오胡錦濤 정권에서 화평굴기和平崛起**를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국제사회에서 G2의 지위를 획득한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은 대국굴기大國崛起***를 주창하며 2050년까지는 미국을 넘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거듭나겠다는 중국몽中國夢**** 개념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세계 질서를 중국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해 베이징에 본부를 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하고, 21세기 육·해상 실크로드인 일대일로一帶一路 사업을 통해 주변국들은 물론 유라시아 및 아프리카 대륙의 60여 주요 국가들과 새로운 경제권을 구축하고자 추진하고 있다.
* 도광양회는 1990년대 덩샤오핑 주석의 외교 방침으로 ‘자신의 재능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인내하면서 때를 기다린다’라는 의미이다.
** 후진타오 정권 초기에 천명된 대외전략으로 ‘평화롭게 우뚝 선다’라는 의미이다.
*** 2003년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에서 시행한 강대국의 흥망성쇠에 대한 집체학습 내용을
바탕으로 중국 중앙방송 (CCTV-2)에서 ‘대국굴기’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2006년 방영하였다.
**** 중국몽은 2012년 당시 시진핑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이 중국공산당 제9대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추대되면서 제시한 정치지도 개념이다.
또한 암암리에 진행해 오던 동북공정東北工程,* 서북공정西北工程, 서남공정西南工程 등 역사 왜곡 작업에 박차를 가해 이웃 국가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각종 역사적 사실들을 중국의 정치적 편의에 따라 곡해하고 있다. 그 결과 중국의 국정교과서는 삼국시대의 왕조를 신라新羅, 백제百濟, 금관가야金官加耶로 기술하고 고구려高句麗를 한국의 역사가 아닌 중국의 중원 왕조에 예속된 소수민족 지방 정권으로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가 수隋, 당唐을 상대로 수행한 전쟁은 한·중 국가 간에 영토와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국제전이 아니라, 중국의 중앙 왕조에 대항하다 소멸된 지방 정권과의 내전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남북국시대의 발해渤海에 대해서도 고구려와의 연계성을 일절 부정하고 중국 소수민족인 속말말갈粟末靺鞨 출신의 대조영大祚榮이 건국한 당의 지방정권이었으며 한족漢族에 흡수되어 소멸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 동북공정이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歷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의
줄임말로서, 중국 동북 3성 - 랴오닝遼寧, 지린吉林, 헤이룽장黑龍江 - 지방의 역사와 현황을
연구하는 프로젝트이다. 주관기관은 중국의 국책 연구기관인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연구센터邊疆史地硏究中心이다. 전병곤, 2004, 『중국의 동북공정과 우리의 대응책』,
pp.3~4 참조.
현대사 분야에서도 중국은 6·25전쟁을 소련과 중국의 계획과 지원 아래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되었고 국제사회가 이에 대응하여 국제전으로 확장된 전쟁이라는 점을 부정하고 있다. 중국은 6·25전쟁이 한반도에서 발발한 남북한 간의 내전이며 미국과 UN군이 이에 ‘무단 개입’하여 ‘제국주의 침략’을 확장하였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로 중국이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保家衛國” 즉, ‘미국에 대항해 조선[북한]을 지키고 가정과 나라를 지키자’라는 구호 아래 중국인민지원군中國人民志願軍을 파병하여 ‘승리한’ 전쟁으로 설명하고 있다.
임진왜란부터 6·25전쟁, 그리고 현 남북대치 상황에 이르기까지 한반도를 대하는 중국의 외교정책은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점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유사시 동부 영토의 1차 방어선 구축이 가능한 거점으로 보는 시각을 유지하고 있다. 정명향도征明嚮導와 가도입명假道入明을 요구하며 조선과 중국을 번국藩國으로 정복하려던 히데요시의 욕망은 대동아공영大東亞共榮의 기치 아래 조선, 만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인들이 ‘덴노天皇’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팔굉일우八紘一宇’*의 세계를 꿈꾼 쇼와昭和시대 일본 정부의 야심으로 계승되었다.
* 일본 파시즘의 핵심사상으로 ‘온 세상이 하나의 지붕 아래’ 있다는 의미이다. 세계가 일본 ‘천황’의
지배 아래 있다는 이념으로, 내선일체内鮮一體 및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圏과 같은
침략이론의 근간이 되었다.
난세에서 난세를 돌아보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는 중, 2022년 2월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재침공하였다. 그 결과 동유럽 각국이 나토NATO 가입을 희망하며 냉전 구도가 재확산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7월에는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전 해상자위대 자위관自衛官의 총격으로 인해 사망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일본 관동군關東軍이 만주를 침략한 만주사변滿洲事變, 그리고 다음 해인 1932년 당시 일본의 총리였던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가 일본제국 해군 장교에게 암살당한 5·15사건과 맞물려 우려스러운 기시감을 느낀다. 사건 이후 일본에서는 정당정치가 실종되고 군사내각 시대를 맞아 군부가 태평양 전쟁을 획책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려는 더욱 깊어진다.
대국굴기大國崛起와 중국몽中國夢을 꿈꾸며 세계 질서를 중국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신중화주의新中華主義 움직임과 ‘보통국가普通國家’를 지향하며 헌법 개정을 통해 자위대의 존재를 명기하고 일본의 재무장을 합법화·공식화하려는 자민당 정부의 움직임을 보며 21세기를 맞아 ‘동북아 국제 패권 질서의 재편성’ 과정이 다시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 이러한 현실을 마주하며 16~17세기 조선의 선조宣祖, 광해군光海君, 인조仁祖와 당시 조정 신료들이 명明과 청淸 그리고 일본을 상대로 느꼈던 고민과 감정이 어땠을지 짐작해 본다.
오늘날 국가간 정치·외교적 갈등은 국민들의 여론을 의식한 국내 정치의 논리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대중들의 감상적 민족주의에 기반한 여론은 형식적·비형식적 역사교육의 결과로 형성된 자국 역사에 대한 인식 및 인접국에 대한 시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박물관은 전시와 교육을 통해 역사를 집단적으로 기억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중들의 배타적 민족주의 경향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실제로, 중국은 1990년대 이후 애국주의 및 사회주의적 가치를 고양하기 위한 정치 이데올로기 수단으로 박물관을 활용하고 있으며, 특히 외세와의 전쟁을 주제로 한 박물관을 육성하고 있다.* 일본의 박물관은 과거 침략의 역사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세계 유일의 피폭국’이라는 점을 내세워 오히려 자신을 전쟁의 희생자로 선전하고 있다.** 동북아에서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다시 고조되어 한·중·일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이 난세에, 대한민국은 무엇을 준비하여야 하는지 그리고 한국의 박물관은 어떤 시각과 입장을 견지해야 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전쟁기념관은 430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 임진왜란 당시의 동북아 국제 정세의 변화와 우리의 대응이 이후 한반도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전시를 통해 살펴보려 한다.
* 중국 정부는 1994년 8월 ‘애국주의교육실시강요愛國主義敎育實施綱要’를 공포하고 국가교육
위원회에서 박물관, 기념관, 혁명전적지 등 100개 교육기지를 지정하여 학교 및 직장내 교육에
적극 활용하도록 하였다. ‘애국주의’란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 간의 갈등과 분열을 우려하여
‘민족주의’라는 용어 대신 채용한 공식 용어이다. 여문환, 2009, 『동아시아 전쟁기억의 국제정치 –
한·중·일 전쟁기념관을 가다!』, pp.108~109 참조.
** 임지현, 2019, 『기억전쟁 – 가해자는 어떻게 피해자가 되었는가』, p.103.
※ 이 글은 2022년 10월 전쟁기념관이 개최한 임진왜란 430주년 기획전 〈파도는 멈춘 적이 없었다〉의
전시 총괄을 맡은 서원주*의 설림說林 중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 서원주, 2022, 「壬辰年의 바다, 그리고 430년 - 다시 난세亂世를 맞아 난세를 돌아보다」,
『임진왜란 430주년 기획전 – 파도는 멈춘 적이 없었다』, 전쟁기념관 전시도록, pp.146~148.
* VIAF ID: 329155103916576200928;
ISNI No: 0000 0004 7366 2961;
ORCID ID: 0000-0002-3954-55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