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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 Nov 22. 2022

선생도 아닌 자가 아이들을 가르치며 느낀 것들

상처 주는 어른이 되진 않았으면 하는 바램


이 편지를 받은 건 내가 좋은 선생이어서가 아니라, 이 나이대 애들이 편지 쓰기를 너무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우습게도 나를 정의하는 명사 중 하나는 선생님이다. 잠깐 가르치고 빠지는 ‘외부강사’가 더 정확하긴 하지만, 어쨌든 아이들은 나를 선생님이라 불러주고 있다.


나는 교육학을 전공하지도, 아이들을 좋아하지도, 심지어 맡고 있는 수업에 대해 전문성을 가진 것도 아닌데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3년차 강사가 되었다. 커피 내리는 짓 수십 시간하고 받는 돈을 몇 시간만 집중해 벌 수 있었고, 마침 운 좋게 소개 받은 곳들이 몇 있었기 때문이다.


자아실현이나 자기만족과는 전혀 상관없는, 철저한 ‘부업’이라 여기던 것이었지만 이렇게 연차가 쌓이다 보니 생각할 거리가 꽤 많아졌다. 오늘은 외부강사로 일하며 있었던 돌발 상황과 강사로서 고민하는 사명감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내 수업의 대부분은 신체 활동이다. 정해진 동작을 따라하고, 박자를 맞추고, 더 나아가선 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며 내면의 감정을 깨치는 작업이다. 즉, 아이들이 ‘책상 앞에 앉아있지 않는’ 활동이란 것이다. 초등생의 엉덩이가 의자에서 떨어지는 순간 발생하는 에너지는 너무도 폭발적이어서 특히나 많은 지도가 필요하다.


신체 활동 수업 내 돌발 상황은 아이들의 안전과 곧장 연관된다. 주체하지 못하고 몸을 움직인 순간 부상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 주어진 수업 시간동안 아이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건 나의 의무기 때문에 각별히 주의를 요해야 한다.




그렇기에 가장 난감한 건 아이들의 이탈이다.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또래와의 갈등에서 복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수업을 거부하며 그냥 교실을 나가버리는 경우가 꽤 있다.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가 아무데서나 주저앉아 울고 있는 것이다.


왜 아이들은 갑자기 교실을 나가버릴까? 왜 순식간에 울음을 터트리며 수업을 거부할까? 적어도 내 세대엔 아무리 속상해도 교실을 이탈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꼰대 맞음, 기억 미화 맞음). 어떤 이들은 요즘 아이들*의 특성이라 한다. 과거와 달리 훈육과 체벌을 금하고 허용적으로 키우는 문화라 지위를 이용한 교도는 효과적이지 않다는 것. 그렇다 보니 집에선 100% 충족되던 감정이 타인과 섞여 조금이라도 떨어질 경우, 그 상태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요즘 애들’이란 지극히 주관적이고 세대를 막론하는 발언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럴 듯한 얘기였고 동감했다. 교사란 직업이 점점 서비스직의 형태를 띠고 있고 체벌은 상상해서도 안 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교실 이탈이 일어나는 와중에 또 한 번은 ADHD(집중력결핍 과다행동 장애)로 의심되는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목적은 수업을 방해하는 것이어서 1초도 쉬지 않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잘 집중하고 있는 옆 친구를 찌르며 괴롭히고, 우스꽝스런 행동을 하고, 일부러 비속어를 사용하고, 그러다 지치면 철푸덕 바닥에 누워 버리는 고작 8살짜리 아이였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그 애에게 모든 방법을 다 시도해봤다. 선생님은 ○○이와 함께 하고 싶은데 같이 참여를 안 해줘서 속상하다며 회유하기도 했고, 조금만 따라 해도 너무너무 잘한다며 담뿍 칭찬하기도 했으며, 굳은 표정으로 정색하며 엄격히 대하거나 수업 후 따로 남겨 면담을 하기도 했다. 어디서든 말썽쟁이 취급 받는다는 스스로를 자학할까봐 일부러 중요한 일을 맡기며 신뢰를 주려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아이의 행동은 개선되지 않았고, 그 학기 수업은 그렇게 끝나 버렸다.


굳이 발달 장애가 아니더라도 이상 행동을 하며 수업에 해를 끼치는 아이들은 많다. 비슷한 시도를 했고 결과는 변함없었지만 처음부터 틀어진 아이라 취급하며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당장 다 큰 어른들도 맘 속 깊숙이 숨은 자신의 결핍, 강박, 열등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애들이라고 그걸 알까. 모르는 게 당연한 나이다.




하지만 문제 행동을 하는 학생이 발생하면 강사는 딜레마에 빠진다. 문제 학생과 모범적으로 수업을 듣던 학생, 두 집단을 동시에 통제해야 할 책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수업을 거부하는 학생을 다시 복귀시키되 그 시간동안 남겨질 다른 아이들을 걱정해야 한다. 순식간에 어수선해지는 학습 분위기도 해결해야 할 난제 중 하나다.


또 외부강사인 나에겐 주어진 시간에 한계가 있다. 80~100분 사이에 학습을 마쳐 결과를 내야한다. 따라서 가장 이성적인 방법은 문제 학생을 무시하는 것이다. 소수 학생에게 시간을 허비하느라 다수 학생의 학습권까지 침해할 순 없다. 미안하지만 울거나 삐지거나 특이 행동을 하는 아이에게서 관심을 거두고 다른 아이들에 집중해야 한다.




그런 문제 아이들을 배제하고 수업을 재개할 때, 난 죄책감과 미안함을 느낀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에도 아이들을 외면하고 방치한 것만 같다. 그 아이들이 느끼는 외로움과 속상함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의지하고 편 들어줄 줄 알았던 선생님마저 등을 돌릴 때, 나를 문제아 취급할 때, 나한테는 엄격하다 다른 친구에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일 때. 교사에게까지 소외 받을 때 얻는 유년시절의 상처가 생각보다 오래 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지난 시간 교사답지 않은 교사들을 너무나 많이 겪었다. 중립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교사의 자질에 어긋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마치 십대 학생들처럼 감정적이었고, 어쩔 땐 그보다 치사했으며, 차별과 편애를 일삼고, 폭언과 위협을 하며, 비윤리적인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들의 편애 대상에서 배제되고 불이익을 겪을 때, 나는 무력감과 소외감을 느꼈다. 어찌 보면 소임을 다하지 않은 그들의 무책임함에 분노해야 할 수도 있었지만 학생이란 하위 계급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호의 받지 못하는데서 오는 수치가 더 컸다. 미성년 시절 ‘어른’에게서 거부당하는 경험은 그 여파가 꽤 오래 간다.


그래서 난 나 같은 상처를 가진 아이들이 있을까봐 염려된다. 내 수업 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비슷하게 행동하는 아이들이 어떤 어른에겐 포기 대상으로 전락해 외면당하고 있을까봐 안쓰럽다. 아니, 다른 이들이 그러든 말든 간에 적어도 나에게선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다.



아이들 눈에 비친 나.


사실 난 이런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의 성장과 사회화를 전담하는 담임이 따로 있고, 난 그저 특정 활동만 잘 가르치면 되는 방문자이자 외부인이기 때문이다. 부업이란 선을 긋고 감정적으로 단절하며 돈 받는 만큼만 마음을 쓰고 싶은데, 성격 탓인지 어릴 적 경험 때문인지 그게 쉽지 않다. 그렇다고 아이들의 심리를 이해하며 보듬어 주자니 전문성과 기술력을 요하는 일이라 능력 밖이기도 하다.


그러니 내가 바라는 건 한 가지다. 내 수업 시간이 아이들에게 최소한 나쁜 것으론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 아이들의 상처를 보듬어줄 순 없지만 적어도 상처를 끼치는 어른이 되진 말자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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