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제스틱 프린세스호가 대만/일본을 물 흐르듯 항해하던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범한 바다 위에서 나는 어느 날부터인가 선내 분위기가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해지기 시작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 영문을 몰라 평소처럼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근무가 끝난 후 크루바에 잠시 들린 나는 순간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벽보의 월중 행사란에 다가 올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 대한 안내문을 보았기 때문이다.
월드컵의 기억
특별히 챙겨보는 스포츠는 없지만 어릴 적 축구선수가 꿈이었던 아빠의 영향으로 나 역시도 어릴 적부터 푸른 잔디밭에서 땀을 흘리며 치열하게 경쟁하는 축구선수들을 수도 없이 보아왔다. 그래서일까 축구는 내게 매우 익숙한 스포츠였고 누군가 '어떤 스포츠 좋아하세요?'라고 물으면 그나만 축구에 가장 흥미가 있다고 즉각 대답이 나오곤 했다.
2002년 월드컵 때는 가족들과 함께 거실 TV 앞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스케치북에 승리를 염원하는 응원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나름대로 응원 태세를 갖춰 온 마음을 다해 태극전사들을 응원했다. 2006년 월드컵 때는 생활체육관에서 수십 명의 동네 주민들과, 2010/2014년 월드컵 때는 거리 한가운데에 설치된 스크린 앞에서 동네 친구들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경기를 관람하곤 했었다.
이렇게 월드컵에 대한 어린 시절의 추억이 지금까지도 행복하게 남아있어서인지 이번 사건을 마주했을 때 나는 그 시절의 열정과 에너지가 다시금 타오르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크루즈에서 월드컵이라니..!'
좀처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나는 벽보에 붙여진 공식적인 대진표를 보고 우리나라 국기를 찾았다. 대한민국은 GROUP F에 배정되어있었는데 상대팀을 살펴보니 스웨덴, 멕시코, 그리고 독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을 국가들과의 승부를 앞두고 있었다.
한동안 크루즈 내부에서는 월드컵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저들끼리 과연 어느 나라가 2ND ROUND에 올라갈 가능성이 높은지 맞추기도 했고 이번 월드컵 챔피언 국가는 이 국가일 것이라며 내기하기도 했다. 비록 축구라는 스포츠에 그다지 흥미가 없다 하여도 크루즈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함께 어울리며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레 이야기의 흐름이 이쪽으로 쏠렸다.
이맘때 크루바에 올라가면 대부분의 크루 멤버들이 맥주 한잔을 걸치며 월드컵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보는 사람으로서 매우 유쾌하고 재미난 풍경이었다.
시간은 흘러 흘러 결전의 날이 되었다. 근무가 없던 날에는 캐빈에서 여유롭게 크루바에서 사 온 스낵을 먹으며 경기를 관람했고, 밤 근무가 한창일 때는 브레이크 타임 때마다 캐빈에 방문하여 TV 리모컨을 찾아 잽싸게 전원을 켰다.
15분이라는 짧은 휴식 시간 동안 조금이라도 경기를 관람하겠다며 전속력으로 달려 캐빈으로 향하는 내 모습에 동료들은 우습다며 호탕하게 웃어댔다.
결국 독일과의 경기에서 당당히 승기를 거머쥔 대한민국. 경기 내내 나는 침대 위에서 편하게 누워 관람을 했었는데 연장전에 돌입한 후로는 초조한 마음에 바닥에 내려와 앉았다 섰다를 반복했다.
마음 졸였던 90분 동안의 게임이 2:0으로 종료되자마자 나는 경기 내내 꾹꾹 눌러 담았던 기쁨의 환호를 터뜨리며 방방 뛰었다. 룸메가 시끄럽다며 장난 반 진담 반으로 약간의 핀잔을 줬지만 그런 그녀의 퉁명스러움도 다 좋았던 그 순간의 찌릿한 희열.
크루즈에서 월드컵 경기를 관람하는 것, 그것도 온전히 경기를 즐길 수 있는 경험이 크루즈를 타면서 몇 번이나 올까, 정말 값진 경험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