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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 Mar 10. 2021

오늘의 승객은 승무원!

승객 없는 크루즈의 주인

푸르른 빛깔 겉면 위로 햇볕에 반사되어 비단결처럼 반짝거리는 청량한 바닷물, 수평선 너머로 해가 뜨고 질 때 즈음 오묘한 빛깔들이 얽히고설켜 곱게 물든 드넓은 하늘은 크루즈에 탑승하면 만나게 되는 자연경관의 아름다움 중 하나이다.


이는 선박의 심장 역할을 하는 브릿지에서, 사방이 훤히 뚫려있는 탁 트인 오픈덱에서, 시원한 파도 소리가 최고로 잘 들리는 보트덱에서, 이야기의 꽃이 피는 라운지 뒤편의 창가에서, 프라이빗한 공간인 선실 내에서 남녀노소 누구라도 쉽게 감상할 수 있는 풍경이다.


이것이야말로 크루즈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이 아닐까. 이 세상 아무리 신비하고 웅장한 경관이라 한들 쉽사리 볼 수 없으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크루즈승무원들은 이런 자연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기가 어렵다. 대부분은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넋 놓고 자연경관을 바라본 다라는 건 어쩌면 사치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일과 수면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차지하는 바다 위의 삶은 육지와 별 다른 점이 없으나 약간의 오락적 요소와 여행이 병행된다는 장점이 있기에 모두들 이토록 고단한 업무를 버텨내지 않나 싶다.




NONE PAX DAY?


어느 날 평범한 우리 일상에 특별한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제스틱 프린세스호가 승객 없는 크루징을 앞두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처음에는 소문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해 몇 번이고 친구들에게 물어봤었는데 마침내 그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수백 척의 크루즈는 저마다 주로 항해하는 노선이 지정되어 있는 편이다. 프린세스 크루즈사의 다이아몬드 프린세스는 대게 일본을 항해하고 카니발 크루즈 라인 대부분의 선박들은 주로 카리브해에 위치해있으며 P&O Australia는 호주와 뉴질랜드를 중심으로 항해하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그렇다는 것뿐 특정 나라와 지역을 구간반복하는 스케줄을 갖고 있지 않은 크루즈 선은 때때로 나라와 나라, 심지어는 대륙을 넘나들기도 한다.



마제스틱 프린세스호에 승선한 지 두 달째 그녀는 상하이 시즌을 성황리에 끝마치고 타이완 시즌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말은 즉, 홈 포트를 상하이 우송코우(吴淞口)에서 타이완 지룽(基隆)으로 옮긴다는 의미였다. 상하이 시즌에는 승객들이 중국 상해에서 승선을 했다면, 타이완 시즌으로 바뀌면서부터는 승객들이 대만 지룽에서 승선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게 상하이 시즌이 끝남과 동시에 선사는 모든 승객을 상하이 우송코우 포트에서 하선시켰고, 덕분에 크루 멤버들은 상하이에서 타이완으로 넘어가는 그 기간 동안 승객 없는 크루즈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근무가 없는 크루즈는 말 그대로 지상 낙원이 따로 없었다. 대부분의 크루 멤버들은 승객들처럼 먹고 마시고 놀며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크루즈 라이프를 온전히 만끽했다.






원하는 만큼 숙면을 취하고 원하는 시간에 기상해 단정한 자율복을 입고 뷔페에서 아침을 먹는다. 햇살이 좋은 오후에는 오픈덱의 썬베드에 누워 일광욕 혹은 수영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데 출출하면 아이스크림이나 피자를 즐기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다. 나른해질 시간 즈음엔 다시 캐빈으로 돌아와 각자의 시간을 보낸다. 이윽고 하늘에 어둠이 내려오면 하나 둘 옷을 갖춰 입고 대극장에서 공연을 관람하거나 카지노, 크루바, 풀 파티장 등에서 불타는 논 팩스 데이(=NONE PAX DAY; 승객 없는 크루즈)의 밤을 지새운다.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흘러 컨트랙의 중반 차에 접어들었다. 이번에는 마침내 크루즈 여행 그 자체가 주 목적인, 전 세계 각국에서 온 다양한 인종과 연령대의 승객들(전 컨트랙 대비)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는데, 비로소 내가 이곳에서 근무하는 이유를 찾은 것만 같아 기쁨이 차올랐다.


더욱이 이번 논 팩스 데이 덕분에 크루즈의 승객이 되어 그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까지. 값진 순간순간들이 새파란 바다를 가로지르는 크루즈 옆으로 넘실거리는 파도와 함께 눈 앞에 일렁였다.


내일은 또 무슨 일이 일어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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