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그림과 나
막연하게 과학자나 대통령을 장래 희망으로 삼던 시기를 지나 처음으로 하고 싶다 생각한 일이 음반가게 점원이었다. 다행히도 내 음악의 길잡이이자 지금도 굳건하게 버텨주는 훌륭한 음반가게를 학창 시절에 만났다. 그리고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든 결과, 21살이 되던 해 그곳에서 ‘불친절한’ 점원으로 일을 할 수 있었다.
주인장의 내공이 굉장한 곳에서 일한다는 것은 음반가게 점원으로서는 최고의 혜택이었다. 그 내공을 믿고 드나드는 또 다른 내공의 사람들의 이야기와 접하기 힘든 다양한 음반들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내 음악의 히스토리는 그곳에서 일하며 대부분 써나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편식 없이 다양한 음악을 누구보다 많이 접하고 들었던 시기였다.
요즘은 독립음반 매장이 새롭게 생겼단 얘길 들으면 반가운 마음이 든다. 그 맘에 멀리 있더라도 직접 방문해 주인장과 짧은 담소를 나누며 몇 장의 음반을 사곤 한다. 난 책과 음반은 되도록 매장에서 직접 구매하는 걸 선호한다. 아무래도 들었다 놨다 고민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꽤 큰 행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입한 책과 음반은 시간이 흐른 뒤에또 다른 추억을 선사하곤 한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쉽게 다가오는 것은 금세 잊힌다.
불현듯 내가 처음으로 일한 음반가게 <소리그림>에 가고 싶단 생각이 마구 들었다.
재수 시절 팻 메쓰니의 ‘Are you going with me’를 듣고 음악의 힘을 처음으로 느낀 그곳. 즐겁게 음악에 대해 얘기했던 그곳. 중고등학생들에게 적당히 구라도 치며 음반 좀 팔아먹던 그곳.
오래간만에 <소리그림>에 들려 가게 형이랑 소주 한 잔을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니 시간이 많이 흘렀음이 느껴졌다. 아직도 내 손길이 닿았던 악성 재고들을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근래 들어 불안하고 마냥 우울했던 마음이 치유되는 기분 또한 느껴졌다. 돌이키니 모든 장면 장면들이 그리운 시간이었다.
형에게 재즈 피아노 앨범으로 추천 좀 해달라고 얘기했다. 어릴 때부터 형의 추천은 나에게 딱 이었다. 그래서 내 음악 취향이 소리그림화 되긴 했다만… ㅎㅎ
요즘 재즈 음반들을 찾아 듣는 내게 '얘가 이제는 맛이 갔구나'라는 소리를 들었다. 가게 형에 보장하는 두 장의 재즈 명반을 봉투에 담아 집에 오는 길은, 어린 시절 추천받은 메탈 음반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는 그때처럼 두근두근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CD 비닐을 벗기고 집 안에 모든 불을 끄고 오디오에 텔로니어스 몽크의 [Thelonious alone in San Francisco] 앨범을 걸었다.
나만을 위한 야밤의 음악 감상실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