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화선이 타 들어간다

서면 지하상가, 1월

by 문독수

나는 태어나기를 쌍가마로 태어났는데, 군복무 시절 내 머리통을 내려다보던 이발병 하나가 두 개의 가마 사이로 드러나기 시작한 두피를 목격하곤 '열린다'는 말을 반사적으로 터트렸다. '도화선이 타 들어간다'고도했는데 왜 그렇게 말했는진 기억나지 않는다.


탈모를 실제로 만난 건 그날이 처음이다.

알고는 있었는데 직접 본 적은 없는, 초음파 사진처럼 형이상적 거리감으로 감각했던 탈모를 그때 처음으로 마주했다.

그날 녀석은 내 눈앞에 나타나 '탈모'하고 울음을 터뜨렸고, 울음을 그치지 않는 녀석을 어쩔 줄 몰라 하다가 그냥 냅다 안아 버렸다.


울고 있는 녀석을 내려다보니 나도 조금은 울고 싶어졌다.




서늘한 꿈을 꾸듯 1월의 지하상가는 회색빛으로 적막했다. 안면 없는 이들과 스칠 적에 일었던 정전기는 까무러칠 듯 사라지고 싶었던 나를 깨웠고, 그날은 N과 J와 만나 어딘가로 걸어가고 있었다. N과 J는 둘 만의 대화에 푹 빠져 있었다. 나는 늘 그렇듯 그들보다 두세 걸음 앞서 걸었다. 나는 걸음이 빠르지 않고 그들은 나보다 키가 크다.


군대 선후임으로 시작해 관성적으로 이어온 이 관계에 나는 대개 만족한 편이었나 하면 잘 모르겠다. 만나는 날 대부분 그들 주변에 가닿지 못하고 공전하는 위성처럼 우주적으로 외로웠던 것 같기도. 그런 내게 두세 걸음은 관계의 역사만큼 익숙하면서도 오래된 거리감각이었고 최소한으로 보장받기 위한 안전거리이기도 했다.


차가운 지하상가 바닥을 질질 끌며 걷고 있는데 문득 N과 J의 대화가 언제부턴가 멈춰있다는 것을 들었다. 나는 혼자 생각했다. 내가 너무 도망치듯 빠르게 걸었나. 아니면 화장실이라도 간 것일까. 다른 생각에 빠져 간다는 말을 듣지 못했나 보다. 그렇다면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그들이 여전히 내 뒤를 걷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만약 그들이 거기에 있으면 어떡하지. 여전히 내 뒤에서 걸음을 걷고 있고 대화는 그저 시답지 않았던 탓에 계속될 수 없었을 뿐이었다면.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나는 긴장을 조금 풀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게 아니라 잘 이어지던 대화를 멈추는 다른 상황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다. 가령 대화 주제보다 더 자극적인 뭔가가 눈에 들어왔는데 그것이 하고 있던 말을 꾹 밀어 넣을 정도라면. 그리고 내게는 들려선 안 된다고 생각해 손가락이나 팔꿈치를 열심히 휘적거리며 무언의 대화를 이어나가는 중이라면. 내가 뒤를 돌아보면 N과 J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빛에 놀란 노루의 표정일까. 당혹감으로 잠시 정지해 있다 곧 그 표정을 거두려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웃음을 빚어 올리려나. N과 J의 얼굴에서 어설픈 머뭇거림이나 혹은 완전히 가시지 않은 비릿한 웃음을 보게 될까봐 나는 조금 긴장했었나.


야 근데 쟤 좀 클난 거 같은데.


어째선지 나는 J가 말하는 '쟤'가 나를 뜻한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말을 하는 J의 얼굴에는 옅은 웃음이 서려있다는 사실도 느낄 수 있었다. 지하상가 천장이 무너지기를 바라면서 나는 고개를 돌렸다. J가 즐거운 듯한 얼굴로 말했다. 니 위에가 휑한데, 탈모가?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휘몰아치듯 N, J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와 그림자같이 늘어진 채로 티비 켰다. 화면에서는 탈모를 한 번도 겪어본 적 없을 것 같이 화사한 여자가 미래를 연상케 하는 유선형의 허연 플라스틱 덩어리를 머리에 쓰고 있다. 무슨 빛을 두피에 발사해 탈모를 죽여버리는 기구인 듯했다. 검색하니 가격은 50만 원 정도였다. 나는 콧웃음을 쳤다. 절대 저렴하지 않은 가격이었지만 탈모를 치료하는 데는 한없이 부족하리라 생각하며 혼자 비웃었다. 머리를 감을 때 느꼈던 아득함이나 실바람만 불어도 목덜미가 딱딱해지는 공포감이 고작 몇십만 원에 해결될 리 없고 그래서는 안 된다. 그건 뭔가 억울하다.


그에 반해 탈모약은 조금 다르다. 탈모약은 한번 먹으면 죽을 때까지 먹어야 한다. 보험 적용도 안 돼 매일 먹는 약치고 꽤 비싸다. 그리고 중간에 멈추면 이전보다 한층 더 사나운 기세로 머리털이 빠질 수 있다. 약발로 하늘거리던 머리털은 한낱 백일몽이었음을 깨닫고 초연하게 머리를 민 후 조금 가벼워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몇 번 들은 적이 있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약을 삼킨다. 극단적인 만큼 효과는 있지만, 사실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다. 불확실한 효과임에도 그에 따른 대가가 존재한다는, 온전치 못함에도 뭔가를 더 요구하는 비상식적인 탈모약이 50만 원 헬멧보다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건 지금 현실이 상식적이지 못하다는 것의 반증일지도. 이제는 세상이 좋아져 50만 원으로도 그 많던 자기 파괴적 정신병에서 벗어날 수도 있는 일인데,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양가감정 또한 탈모 증상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휴대폰을 들어 이런저런 단어들을 조합해 본다. 남자정수리탈모 탈모약후기 부산탈모약성지 아보다트부작용 피나스트레이드부작용 탈모약발기부전 탈모약임신부작용. 수십 번은 더 봤을 똑같은 내용과 똑같은 조언들을 다시 한번 씹어 삼킨다. 당장의 머리털을 자라게 하는 걸 넘어 초장기적인 가족계획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익숙한 아득함.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건 하지 않음으로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책임없는 공허한 말들에 맡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가능한 상황 속에 나는 가능성으로 하루하루 시들어가는 기분이고, 이렇듯 색을 잃고 비워지는 기분이 들 때마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수면 위로 떠오르곤 하는데, 사춘기 시절 여드름으로 고민하던 내게 외삼촌은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말했다. 그냥 두면 알아서 나을 테니 괜히 신경을 쏟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다른 것에 집중하라는 뜻에서였다. 그냥 하기도 힘든 공부를 주렁주렁 매달린 여드름을 애써 무시하며 몇 시간을 앉아서 한다는 게 나의 보통만큼의 의지력으론 한참 부족했다. 계속 쳐다보고 들쑤시길 반복했으니 여드름은 그 이후로도 한참을 나와 함께 했고 학업 성적은 다행히 보통 수준을 지켜냈다. 외삼촌의 동문서답 같던 조언은 여드름 퇴치에 큰 도움은 안 됐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20년이 다 되도록 그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원하는 건 원하지 않을 때 찾아온다는 말처럼 머리카락도 크리스마스이브 새벽날처럼 머리맡에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유아적인 믿음을 나는 꽤 진지하게 받들고 있다.




탈모는 한 세대를 걸러 찾아온다는 말은 J의 판결 이후 내게는 사뭇 새롭게 다가왔다. 외할아버지의 매끈한 두피와 엄마의 빼곡한 머리숱에서 야릇한 박자감을 느낀 것도 그때부터다. 사그라들었다가 다시 몰아치길 반복하는 오래된 리듬. 얼굴 없는 혈육들이 묵묵하게 이어온 빛바랜 음표들. 자연을 빼다박은 듯 의도 없이 잔인한 선율적 곡선이 합주실 천장을 흔들며 또 한 번의 하강을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연주가 모든 감정을 세월에 흘려보낸 표정을 하고 내게 다가오고 있다.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합주실을 나가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나가는 문이 보이지 않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