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불변의 객관적 진리가 존재하며 그런 진리에 대한 인식 또한 가능하다는 믿음(인식)에 맞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 특정 시간과 공간 그리고 주관이라는 삶의 조건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래서 모든 것은 특수하며 주관적으로 체험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다. 따라서 인식은 주관적이며 상대적일 수밖에 없다. 짜라투스트라가 주장하는 니체의 주장이 바로 그런 것이다.
순수인식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정신’에서 출발한다. 정신은 비물질적인 것으로서 시간과 공간 같은 물리적 조건과 주관에서 벗어나 있다. 그만큼 자립적이어서 때가 묻지 않았다. 그런 정신이 하는 일은 추상을 통해 경험세계의 특수하며 상대적인 것들을 걸러내며 그 뒤에 있는 절대 불변의 존재를 인식하는 일이다.
반대로 그런 인식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신체’에서 출발한다. 저들의 주장에 따르면 물질적인 신체는 시간과 공간이란 특수하며 상대적인 것으로 주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절대 불변의 존재를 가정해 볼 수 있지만, 신체적 경험을 인식의 출발점으로 삼는 한 그런 것을 인식할 길은 없다. 저들의 결론은 특수하며 상대적인 조건들에 따른 ‘때 묻은’ 깨달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생명에게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삶의 현실을 단순화해서 파괴하는 그 길은 추상이 곧 죽음이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추상을 하면서까지 때 묻지 않은 깨달음에 집착하는가? 단순화하지 않고서는 역동적 세계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수시로 달라지는 세계는 늘 불안정하다. 영원히 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더욱 안정적인 삶을 살고, 그와 함게 우리 존재 또한 의미를 갖는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설서> '때묻지 않은 깨달음이란 것에 대하여' 단락에서 정리
서정이의 결론은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란 없다. 순수인식이나 절대자도 없다. 모든 진리는 상황에 따라 바뀐다. 왜 우리는 시공간의 영향에서 벗어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