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한국 TOP 10에 계속 떠 있어서, 가까운 지인이 추천해줘서, 그리고 콘텐츠 트렌드였는지 간간히 추천 글도 보여서 보게 되었다. 사실 그동안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빠져 긴 드라마를 보는 일은 몇 개월 간 없었는데 최근에 어쩌다 보니 스타트업과 인간 수업, 이 퀸즈 갬빗을 몰아보게 되었다. 사실 체스라는 소재가 그다지 흥미롭진 않아서 큰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시작하니 금방 다 몰아보게 되었고 마지막화까지 보고 나서는 어쩔 수 없이 내겐 미국식 히어로물이면 어느 정도 평타를 치는구나 라는 결론을 내렸다.
처음엔 실화 기반인가 했는데, 그게 아님에도 체스라는 소재로 드라마를 만들 생각을 하다니! 에 1차 신선했고, 그리고 그 성공의 중심이 여성이라니! 에 어느 정도 페미니즘 영화겠거니 싶었는데 물론 그런 의도가 없진 않겠지만 마지막화까지 보고 난 뒤에는 어쩔 수 없는 신냉전체제 속에 미국인의 고난 극복과 성공을 그린 히어로물이구나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불우한 어린 시절, 약 중독은 영웅이 될 주인공에 연민과 감정이입을 하도록 만드는 장치였고, 체스를 가르쳐준 관리인은 마치 영웅이 되기 위해 귀인을 만나는 것과 같은 흐름이었다. 여기서 큰 갈등은 초반엔 여성 체스 기사로서의 사회적인 시선일 줄 알았는데, 불우한 어린 시절로 인한 결핍과 자기 연민을 극복하지 못해 약과 술에 찌들어 사는 본인의 핸디캡 극복이 주요 갈등이었고, 체스 상대를 한 명씩 이기면서 그 극복을 헤쳐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은 소련이라는 적진에서, 어릴 때부터 그리고 사회적으로도 체스의 엘리트 교육 환경을 거쳐온 보르고프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약과 술에 찌들어있더 고아 여성이 이기는 것으로 끝을 맺는데, 역시. 마지막화에 미국인이라는 걸 여러 번 반복하는 걸 보면서 깊이 있는 감상보다는 한 편의 어벤저스와 같은 히어로물이었구나를 마지막화에 다 달아서야 깨달았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런 주인공이 결국 나중에 이 천재적인 능력의 머리로 타이즈를 입고 외계인과 맞서 싸우는 액션을 보여줘도 이미 미국식 히어로물에 익숙한 나는 위화감 없이 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절대적인 악이나 악당이 없어서 히어로 영화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게 유일한 반전인 영화.(영화에서 가장 큰 악당은 진정제와 술이다) 소재나 장치는 자극적 일지 몰라도 인물 표현방식은 매우 순해서 피곤하지 않게 드라마를 표현할 수 있구나를 느끼게 해 준 시리즈였다.
바로 인간 수업을 보고 난 뒤에 이어서 봐서 그런지 몰라도 순하지만 이런 소재를 실화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재밌게 풀어낼 수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준 미묘하면서도 단순 명쾌한 깔끔한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