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봄볕이 좋아, 햇차 들이고
차와 가장 가까운 벗을 꼽으라면 사람보다는 차도구다.
신영복 교수는 모든 자연물 중 사람이 가장 완벽한 소비의 주체라 했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여 삶을 끌어가는 식물과, 그 식물을 소비하며 살아가는 동물,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소비하는 최상위 포식자인 사람. 자연 회복의 속도를 넘어서서 무엇이든 무섭게 해치워버리는 사람의 소비 근성은, 순환보다는 단절을 반복함으로써 함께 살아가는 생명체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있다. 다실에서 역시 마찬가지다. 차 마시는 이는 차를 소비하는 이일 뿐. 퇴수기에는 우리가 마신 찻잎이 어느새 수북하게 쌓여간다.
하지만 사람과 달리 차호는 무리에서 떨어져나간 찻잎을 따뜻하게 감싸안는다. 찻잔은 물과 만남으로써 드러난 차의 속내를 불평 없이 받아내고, 머문 흔적을 제 몸에 새긴다. 그래서 차도구를 들이는 일은 나의 벗이 아닌, 차의 벗을 엮어주는 것이다. 내게 소진될 차를 위한 최소한의 위안과 배려인 셈이다. 특히 차호는 그 속에 담긴 차와 내밀한 소통을 이루고 교감을 펼치는 주체이므로, 고를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차 마시는 이들 중에는 차맛을 좋게 하는 차호가 따로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보이차는 보이차에 맞는, 홍차는 홍차에 맞는 차호가 있다는 식이다. 그러나 차호는 차와 물을 담는 하드웨어이자, 그 둘이 조화를 이루도록 지켜주는 서포터일 뿐이다. 진실로 차호가 차의 맛을 바꾼다면, 그리고 그 맛의 왜곡을 용인한다면, 우리는 평생 그 차가 가진 본연의 차맛을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차호는 최대한 차의 맛을 훼손시키지 않은 채, 온전히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쓴 맛은 쓴 그대로, 거친 느낌 또한 그 느낌 그대로... 그런 점에서 고온소성한 백자차호는 차맛을 중립적으로 전달하는 차도구라 할 만하다. 또 유약을 발라 고온소성함으로써 찻물이 거의 흡수되지 않도록 만든 분청차호도 좋다. 유약을 바르지 않았다면 태토를 충분히 자화시켜 찻물이 차호 속에서 쉬이 스며들지 않아야 한다.
만약 연질차호라면, 흙내를 없애는 양호의 과정을 철저히 거쳐야 한다. 그리고 가급적 한 종류의 차를 정해두고 마시는 편이 좋다. 흡수되더라도 다양한 찻물이 배어들어 그 맛이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다.
다락당에서 찻물을 뿜어내는 이들로 진주요의 백자차호와 현암요의 무유차호를 주로 쓴다. 백자차호는정말이지 어떤 차를 우려도 있는 그대로 맛을 보여준다. 황차를 우리다가 찻잎을 비우고 뜨거운 물과 찬 물로 헹군 다음, 녹차를 우리면 이전의 황차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다. 주제넘지 않고 충실하게 서포터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꼼꼼하게 수비한 흙으로 빚고, 고온소성한 무유차호 역시 내부 면에 찻물이 침입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관 속에 물을 담았다가 비우고 한참 후에 기울여보니, 약간 남아있던 물이 전혀 흡수되지 않고 그대로 흘러내린다. 태토가 땡땡하게 잘 익었고, 면의 입자가 조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개성을 느낀다. 모두 실용성과 예술성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 예술적 지향은 전혀 다르다. 진주요의 백자차호는 유백색 바탕에 물대의 엉뚱함, 달항아리 같은 몸체 등에서 인간미가 넘쳐난다. 전통적인 우리 민족의 특성이 떠오르기도 하고... 한 마디로 인문학적 감성이 곳곳에 묻어난다. 그러나 현암요의 무유차호는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수리과학적 결과물을 보는 것같다. 빈틈없는 유격 처리, 좌우의 균형감, 완벽한 금수와 절수 등이 다관에 이십여 년을 바쳐온 작가의 철두철미함을 대변한다. 거기에 불의 요변이 만들어낸 불확정성의 아름다움이 남은 2퍼센트를 마저 채웠다.
지금 이 시대 차도구의 정점은 다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많은 차인들이 다완의 미학에 매료되었고, 일본이 발전시킨 말차 문화를 수용하면서 다완에 대한 관심을 키워왔다. 그러나 차호 또한 다완 못지 않게 차 생활을 하는 데 있어 비중이 큰 기물이다. 오히려 사기장들은 기술적인 면에서 다완보다 차호가 더욱 만들기가 까탈스럽고, 신경이 쓰인다고 한다.
찻잎을 우려마시는 포다법이 본격화된 명나라 시절부터 차호는 찻자리의 한 가운데서 찻물을 품고 나누어왔다. 다락당 작은 차탁, 그리고 그곳에서 묵묵히 찻물 나르는 차호의 삶 또한 불가에서는 보시 그 자체이다. 차호가 잉태한 찻물, 이를 받아안은 찻잔, 그리고 서슴없이 꿀떡꿀떡 소비만 하고 앉아있는 나. 사람의 염치가 어떤지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차호도, 사람도, 과거의 그때에 비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