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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대드, 변신의 시간

단 하루도 똑같지 않은 이유로 피곤한 워킹대드의 마음가짐


굳게 쥔 주먹으로 퉁퉁 소리가 울릴 만큼 크게 가슴을 두드린다.


영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에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매튜 매커너히가 함께 식사하는 장면은 매튜 매커너히의 이 가슴 두드리기(chest bump)로 시작한다.

매튜 매커너히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가슴을 두드리며 콧속에 하얀 가루 털어놓고, 리듬에 맞춰 흥얼거리더니 앱솔루트 마티니를 시킨 후, 월스트리트에 첫 출근한 초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에게 월스트리트에서 살아남기 위한 '팁(tip)'이 아닌 '처방전(prescription)'을 전수한다. 전쟁터 같은 월스트리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제정신으로는 어렵다는 점을 보여주는 한편, 일반인이 월스트리트의 딜러로 변신하는 일종의 주술 의식처럼 비치기도 한다.


꼭 월스트리트가 아니라도 나 역시 그렇다.

6시 정시 퇴근 무렵, 퇴근 지하철에 오른다. KF94 마스크를 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갑자기 추워진 0°C에 가까운 날씨에도 지하철 안은 후끈하다. 출퇴근길 직장인에게 사회적 거리두기는 없다.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만의 의식을 시작한다. 회사원에서 나로 돌아오는 저녁 처방.


콩나물시루 같은 지하철에서 하얀색 콩나물을 꺼내  빠지지 않게 조심조심 귀에 꼽는다. 커널형은 답답해서 에어팟 1세대를 고집하는 중이다. 페어링 연결음이 경쾌하다. 유튜브 프리미엄으로 저장해둔 영상들과 넷플릭스 저장 파일을 뒤적인다.  끼운 에어팟과 손에  작은 화면 하나로 수많은 인파 속에 나만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누구도 침범할  없는 나의 시공. 나에게 허락된 40분의 시간. 50분짜리 넷플릭스 시리즈를 끊어갈 것인가, 쯔양의 울릉도 먹방과 임창정 골프채널 사장님 나이스 , 유퀴즈  클립 영상을 섞어  것인가. 결정은 그날의 기분에 따르지만, 절대로 변하지 않는 나만의 루틴이 존재한다.


퇴근의 마무리는 '오은영 박사의 영상 보기'


버튼 하나로 워킹대드 모드 on!

워킹대드가 되기로 했다면, 워킹대드에게도 변신의 시간이 필요하다.


좋아하는 예능과 보고 싶었던 유튜브, 넷플릭스의 영상들은 수많은 회사원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나의 얼굴을 찾게 하는 루틴이다.

'원하는 것을 하는 것'. '해야하는 일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 '원하는 일을 어떤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하는 것'이 주는 해방감은 명확한 자아회복의 순간을 제공한다. 마지막으로 쓰고 있던 회사원으로서의 페르소나를 한 올도 남기지 않고 벗어버리려 노력한다. 완전히 탈피하지 않아도 되고, 그럴 수밖에 없다. 중요한 건, 내 마음 속 가장 순수하고 간단한 욕망을 충족함시킴으로서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점이다.


그렇게 자아가 회복되면 이제 다시 아빠 모드로 돌입하기 위한 준비가 되었다.

보통은 지하철에서 내려 걸어가는 10분여의 파워워킹으로 정신을 맑게 하고, 일터의 고단함을 벗고 짜증과 화의 흔적을 마음속으로 잠시 감추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일과 중 벌어진 오만가지  사건사고의  어수선함을 그날의 해프닝으로 웃어넘긴다. 몸을 움직이고, 큰 소리로 웃으면 잔뜩 움츠렀던 기운이 살짝 움튼다. 자칫 스트레스가 남아있는 상태로 귀가하면 온 몸이 방아쇠 같고, 아들은 방아쇠를 누르고 싶어서 기웃거리는 상황이 연출되기 십상이다. 옅은 감정의 찌꺼기가 남았을 때 오은영 박사의 목소리는 또 하나의 주문이다.


'자 봅시다', '잠깐만요', '아이는 성장하고 배우는 존재입니다'와 같은 익숙한 말들이 가슴 깊숙이 박힌다.

"아이는 미성숙한 자아입니다. 한 번이 아니라, 수백 수천번의 반복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공부 점수가 좋은 것이 기억 남는 게 아니라, 열심히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받은 좋은 경험이 기억에 남습니다."



말과 마음, 모두 변화가 필요하다. 매일마다...


버튼 하나 눌러 나노입자가 온몸을 감싸는 것도, 요술봉 놀려 감춰진 능력이 짜잔'하고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나에게는 오은영 박사의 목소리는 변신 버튼 같다. 현관 입구에서 에어팟을 뺄 때까지, 오은영 박사님의 목소리가 담긴 영상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릿속에 '수천번의 반복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가 공명한 상태로 워킹대드 모드에 돌입한다. 신성한 주문이자 자기암시이다.


영상을 보고난 직후에는 인사하는 목소리부터 다르다. 누구도 건들 수 없을 것 같은 지친 포스로 낮게 말하는 인사가 아니라,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올리브영 점원분의 목소리처럼 솔톤으로 인사를 건넨다. 그러면 반기는 아들 목소리의 텐션 역시 확연히 차이난다. 꼭 껴안아준다면 그걸로 변신은 완성된다.


특히 전날 내가 부족했던 상황을 복기할 수 있는 영상이 있다면 찾아보고 들어간다면 더욱 도움된다. 일종의 오답노트 같은 마음으로 전날의 나의 반응을 천천히 살핀다. 전날 아들의 행동과 나의 행동을 되돌아본다. 하루만 지나도 불편한 감정없이 나의 행동과 말을 객관화할 수 있다.


놀아달라는 아이의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이 소리는 더 크게 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온다. 밥을 먹다가 엉덩이를 떼고 흥에 겨워 노래부를 때, 내가 해야 할 말은 밥상에서의 행동을 제시하고, 정해진 시간을 알려주는 것뿐이다. 숙제가 즐거울 리 없는 아들의 마음에 공감해주는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여유가 된다면 같이 앉아서 해당 문제를 풀어가는 스스로 생각하는 올바른 방법을 보여주는 것도 괜찮다.


나는 완벽하지 않다.

워킹대드는 더욱 완벽하지 않다.

변신모드의 지속시간 역시 기껏해야 1시간을 넘기기 쉽지 않다.

고비는 매순간 찾아온다.

하지만 괜찮다고 스스로를 응원한다.

나 역시 아빠로 사는 것도 처음이고, 우리 아버지의 육아와 나의 육아 역시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퇴근길 주문을 외워보자.


야발라바히야 야발라바히야

한번 더 될 때까지 oh yeah!

야발라바히야모하이마모하이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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