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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세대 아빠의 육아: 40년 전 엄마에게서 독립하는 중

"너는 도대체 누구를 닮아서 그렇니 "

한탄의 말끝이 흐린 이유는 그 말을 내뱉은 부모가 이미 답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른은 아이의 거울'이라지만, 되려 ‘아이는 어른의 얼굴’이란 표현이 적합하게 느껴지는 때가 더 많다. 육아를 하다 보면 아이의 얼굴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보통 그렇게 떠올려지는 내 얼굴은 30년  엄마, 아버지처럼 근엄하다. 입에서 뱉어지는 내용 역시 쌍팔년도 엄마빠의 얘기와 대동소이하다. 더 소름 끼치는 건 내 짙은 파열음과 굉음. 목청 좋은 아버지의 우레와 같은 사자후를 똑 닮았다.


이 소름 끼치는 데자뷔는 생각보다 빈번하게 발생한다.




아들을 배웅 나간 등굣길 어느 날. 교문을 들어가다 말고 뒤돌아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잔소리가 너무 많아.”


현관문을 나서면서부터 10분도 안 되시는 시간 동안 내뱉은 잔소리만 헤아려봐도 어림 잠아 열 개정도 되는 걸 보니  뜨끔할 수밖에 없다.


“지퍼 잠가라”

“가방 똑바로 매라”

“횡단보도 앞에서 꼭 멈춰라”

“선생님 만나자마자 인사해라”

“학교 끝나고 어느 길로 올 거냐”


장성한 스무 살 즈음까지도 부모님께 들었던 레퍼토리를 내가 읊고 있다. 이 말을 내뱉으면서도 당시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기보다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어린 시절 내 마음의 소리가 더 가까이 들려온다. 물론 좋은 의도다. 하나하나 미리 알려주고, 주지시켜주기 위함이라는 배려도 담겨있다. 하지만 내가 등굣길에 내뱉은 얘기의 90% 이상은 이미 아들 녀석도 다 알고 있는 내용이다. 8살, 품 안의 자식이란 틀에 가둬 아들은 너무 얕보는 게 아닌가. 많은 말보다 ‘조심히 잘 다녀와’ 한 마디면 되는 것을...




내가 잔소리가 많은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기저에는 기질적, 성장과정에서의 교육, 사회적 요인의 복합적 원인이 뒤섞여있는 듯했다.  


일단 기질적으로 예민하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이 많다 보니 거슬리는 지점이 많다. 아들의 숙제를 봐줄 때 숙제를 틀리는 것보다 바른 자세로 앉아있지 않는 것, 하기 싫다고 징징대는 것을 설득하는 게 더 힘들다. '숙제를 한다'는 본질과는 동떨어진 태도로 실랑이하는 경우가 더 많다 보니 자연스레 잔소리는 늘어난다.


사회적 요인도 크다. 모든 직장인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조직을 관리하고 함께 일하는 과정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 끊임없이 체크하고 확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들이다. 예고 없이 튀어나오는 챌린지와 결과에 대한 아쉬운 점을 강평하는 것이 기본으로 장착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잔소리가 많은 이유는 부모님의 양육 방식에서 원인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는 잔소리가 많고, 아버지는 조용히 보고 계시다 욱하는 경우가 많다. 아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는 이 두 가지를 절묘하게 섞어놓은 것 같다. 무척 헌신적인 태도로 아들에게 끊임없이 확인하고 말을 건다. 그러다 아들의 태도가 반응 속도가 마뜩잖으면 버럭 하는 경우가 있다.


이미 겪어온 일이고 그런 태도로 임하고 싶지 않다고 끊임없이 되뇌어보지만, 꽤 깊게 각인된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좋지 않은 태도가 불현듯 튀어나온다. 당연히 이런 육아 방식과 태도는 효과적이지 않고, 역효과가 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고쳐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나의 엄마는 환갑이 넘은 아들에게도 ‘차조심하고 밥 꼭꼭 씹어먹으라’할 분이다.


날이 추우면 새벽 4시에 일어나 등교할 사내 녀석 운동화를 보일러 곁에 두고 발이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절절 끓게 해 두셨다. 아침에는 사과 한 개, 오미자 우린 물에 꿀 한 스푼, 아침엔 뭐라도 먹어야 한다고 아들보다 두 시간 먼저 일어나 갓 지은 밥을 해다 바치고 그 호사를 투정으로 받는 아들들에게 진상했다. 진상 아들들 운 호강에 겨워, 긴 시간 준비한 엄마의 음식을 입 만대고 등교하기 일쑤. 안 먹으면 '한 입안 먹어라.' 그래도 안 먹으면 그릇을 들고 따라다니며 수저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헌신적인 사랑과 나노 단위 마이크로 매니지먼트 덕분에 나는 큰 문제없이 잘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잦은 잔소리에 귀는 따가웠지만 몸은 편했다. 많이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깨우면 일어나고, 졸리면 더 누워있다 시간이 흐르면 왜 안 깨웠냐 소리치고 서둘러 옷 입고 등교하면 그만인, 모든 것이 다 준비되어 있던 삶. 쾅하고 닫힌 현관문 뒤에 엄마는 밥을 김에 싸 들고 계셨을게다.'어머니의 사랑은 무한하다'는 표현은 우리 어머니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유난스럽다 싶을 정도로 사랑을 주는 분이시다. 무한한 사랑을 받은 덕에 나는 아들에게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데 거리낌이 없는 아빠가 됐다.

어머니는 마이크로 매니지먼트의 끝판왕이셨다. 본인의 범위 내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정보를 꿰고 계셔야 했다. 덕분에 아들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 형제는 큰 어려움을 맞닥드리지 않고 모나지 않게 잘 자라났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사소한 것에 예민한 나의 태도가 오롯이 타고난 기질 때문만은 아니란 걸 깨닫게 됐다.

 모든 걸 헌신한 어머니의 방식이, 성인이 된 나의 사과/행동방식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선의 가늘 좋은 결과를 담보하지는 않듯. 내 모든 need를 충족시키는 쪽으로 최선을 다했던 엄마의 교육방식은 짧은 결핍에도 예민하게 구는 내  인내심의 역치를 더욱 약화시킨 것 같다.


어머니의 방식을 탓하거나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과한 관여와 잔소리는 내가 경계해야 할 육아방식임과 동시에 너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가장 익숙한 육아방식임을 인정해야 한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나은 육아/교육법을 찾는 것은 나의 몫이다.




양육의 궁극적 목적은 자녀의 독립이라는 점을 지속적으로 상기해야 한다. 

과한 기대와 부모 의존적이 되게 만드는 유아적 대응보다는 독립 객체로서의 존중과 신뢰를 보내야 한다. 존중에는 관심이 필수고 신뢰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인내와 관심은 '시간' 만큼 깊어진다.  마이크로 매니징 할수록 즉시적 실적이 나는 시험과 숙제일수록 더욱 인내하고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갖난쟁이를 키우는 동안은 아이가 목을 가눌 수 있게, 뒤집기를 할 수 있게, 배밀이를 지나 걸음마를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주었다.

넘어질까 걱정되어 미리 잡아줘도 안 되고, 넘어져서 울 때 팔짱 끼고 내버려 둘 수만도 없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무관심해 보이지 않게, 아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힘을 주면 그걸로 충분하다.

책에서 알려준 데로 굳이 책을 보지 않아도 우리는 그 어린 핏덩이의 양육자이면서 우주이고 말과 눈짓, 온갖 몸짓과 잦은 스킨십으로 사랑과 온기를 확인한다.

긴 기다림 끝에 짧은 응대로도 우린 세상 가장 행복한 존재이다.


그렇게 잘 기다리는 내가 아이가 아이가 움직이고 말을 하기 시작하자 성인과 함께 한다고 착각한다.

"얘가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걔는 아직 말을 알아들어가는 과정에 있는 아이다.

아이와 얘기한다고 완벽한 소통을 시작했다는 헛된 망상은 버리자. 우리 상대는 성인이 아니다.


한살이든 열 살이든 아이에게 시간은 동일하게 필요하다.


이 시간은 과거의 나와 과거 속 나를 꼭 품에 안은 엄마에게 독립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너무 소중해 세상의 온갖 더러움은 닿지 못하게 막아주고 사랑해주는 서른 살의  엄마와 안녕을 고해야 한다. 힘들 때 떠올려지는 따뜻한 품은 당연히 거기에 늘 있다. 하지만 내가 아들의 그늘과 품이 되어주려면 과거와 사회적 거리두기 해보자.

엄마의 방식에서 '사랑'만 남기고 인내와 관심을 더하자. 관심은 피상적이지 않게 관찰과 놀이를 통해 끄집어내 보자.


그 과정 속에 한결 성숙해진 나와 더욱 사랑하게 될 아들과 엄마가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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