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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킹대드 Jul 02. 2024

아들육아 10년 차 : 아들과 나, 그리고 아빠.

[아들과 나]

아들 육아 10년 차에 접어들었다.


어영부영 아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로 이뤄지는 건 없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국내 흥행은 12만 명 정도이지만, 영화의 개봉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아빠 육아라는 키워드에 같이 언급되는 이 영화의 제목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걸 보면 아버지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는 공감대는 형성되어 있는 것 같다.

'언제쯤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는 '언제 어른이 되는가'와 함께 절대 완료형이 될 수 없는 진행형, 질문형식의 명제이다. 나는 지금도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좋은 아빠가 무엇인지 정의 내리기 쉽지 않지만, 어렸을 때 싫었던 아빠의 모습과 이를 반면교사 삼아 설정해 둔 좋은 아빠의 표상으로 삼은 이상적인 일들을 해보기 시작했다.


같이 운동하기
같이 영화 보고 대화하기
같이 도서관 가기
유명 스포츠스타의 공연 함께 가기
아들과 미술관 가기
예고 없이 버럭 하지 않기

같이하는 시간을 늘리고, 아이를 내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기는 행동을 하지 말자는 기본적인 기준들을 삼았다.


출근하기 전 아들과 대화하면서 같이 등교하고, 잔뜩 예민해진 퇴근길에는 아빠라는 자격으로 돌아가기 위한 스스로를 세뇌시키는 최민준, 오은영 선생의 영상을 돌려 보며 마인드 컨트롤 했다.

천성이 게으른 나는 굳이 시간을 내서 평소라면 잘하지 않을 것 같은 아들과의 여행도 기획했다. 아들의 취학 직전 15일의 휴가를 내어 함께 국내여행을 다녀오기도 하고, 코로나19 시국에는 육아휴직을 하면서 공백이 생긴 아들의 외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는 아빠 육아에 더욱 관심을 가졌다.

워킹대디라는 아이디도 그때부터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아들과 도서관 가기는 유튜브에 소개된 좋은 아빠처럼 시간을 거쳐 매일 방문하며 도서관에 대한 아들의 호기심을 높일 정도로 부지런하게 행하지 못했고, 아무리 마인드컨트롤해도 잔뜩 예민한 내 천성은 아들의 반복된 실수에 버럭 하기 일쑤였다. 밖에서 놀다 다치고 돌아온 아이를 위로하기보다 다치게 된 경위를 듣고 그의 부주의함에 버럭 하기도 했다. 영화관이나 뮤지컬 공연장에서 나란히 몇 시간 동안 작품을 보고 평온하게 나와 아들과 해당 작품에 대해 논의하는 아름다운 그림은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아들은 어두운 시각적 자극보다 거대한 청각적 자극에 극도로 예민하고, 영화관과 뮤지컬 공연장의 큰 음향은 아들의 불안함을 자극하는 최악의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마음과 다른 행동과 수정되기보다 실수를 반복하는 나의 패턴에 매일, 매 순간을 되뇌며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를 보며 반성하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아들의 폭풍성장은 가속도가 붙는 형국이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보던 유년기를 거쳐, 점차 청소년기 초입으로 다가가는 아들과의 반목과 화애는 하루에도 여러 번 반복될 수밖에 없다.

대화에 대면대면 '응'이라 대답하는 아들. 귀가하는 순간, 친구들과 놀기 위해 입구에 던져진 아들 가방을 보면서 1절로 끝나지 않는 나의 잔소리. 현재의 편안함을 위해 숙제를 미루는 모습, 그 사실을 안 아빠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얕은 눈속임의 핑계를 대는 것.


아들의 이런 행동을 하는 과정에서 너무 자연스럽게 그 당시 내 모습을 관망하는 아빠를 생각한다.

아빠에 대한 생각, 엄마에게는 형이라는 우군이 있으니 나는 아빠 편, 뭐 이런 건 아니고…


아들의 지금 행동에는 내 어린 시절이 겹쳐 투영되고, 아버지 행동과 말의 이유를 알려줄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 같은 게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 아빠의 모습은 예상외로 꽤나 또렷하게 떠오른다.


47년생, 경북 의성출신인 아빠와 77년생, 서울 이문동 출신인 나.

무뚝뚝한 아빠와는 다르게 살갑고 다정한 맛이 있는 서울사람인 나는 엄마를 닮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지만, 사실 나는 아버지를 더 닮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빠는 감정적으로 섬세한 사람이다. 나도 그렇다.

아빠는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고 싶어 한다. 나도 그렇다.

아빠는 영화와 이야기를 좋아한다. 나도 그렇다.


좋은 점만 그럴 리 없다.


아빠는 욱하는 성격이 있고, 나도 그렇다.

아빠와 마찬가지로 나도 게을러 보이는 면이 있다.

우리 둘 다 실수를 싫어하고 그런 상황에 대해 화를 먼저 낸다.


섬세함은 예민함이기도 해서 외부에서는 참고 가족에게는 푸는 성향이 짙다. 예상가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문제를 마주하는 것보다 충분히 예견되는 상황을 막지 못한 상황에 화가 난다. 이런 성향이 절대 불변은 아니지만, 나의 이런 성향이 튀어나올 때마다 아빠를 떠올리고 탓을 하기도 했다.

아들의 부주의함으로 다쳐왔을 때, 왜 부주의해서 다치냐고 말하는 것은 아빠도 동일했고, 이는 나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움의 표현이었다. 그렇다고 그 표현법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니, 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기에 앞서 아들을 위로하는 것을 우선해야 하고, 나의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방법은 반드시 변화시켜야 한다.


내가 초4~5학년 정도 되었을 때, 이종사촌 가족들과 계곡으로 놀러 갔는데, 바쁘게 준비하다 보니 내 수영복을 안 가져갔었다. 다들 계곡물에 입수해 잘 노는데, 나는 들어가기 싫었다. 갈아입을 옷 있으니, 그냥 속옷 입고 물속에 들어가라는 말하는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심지어 계속된 강권에 나는 눈물이 났고, 아빠는 그런 것도 못하나며, 아무것도 문제 되지 않는 일로 사람들에게 피해 입힌다고 혼을 냈다.

비슷한 일은 반대의 경우로 아들과 나에게도 일어난다.

호텔 건물 밖 분수대 형태로 된 물놀이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아들은 그 속에서 놀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난 체크아웃 시간 후였고, 여분의 옷도 없으며 그 뙤약볕에서 그런 걸 하면서 뛰길 바라는 아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아들을 제지하지만 다른 얘기엔 귀를 기울이던 아들이 이번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별것 아닌 상황에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화를 냈고, 아들은 엄청 속상한 마음이지만 물놀이를 멈출 수 없었다.


아들을 키우면서 내게 발생하는 상황과 문제들, 나의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때의 아빠를 떠올리고 해답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지난 세월 쌓아온 아빠와의 친밀감보다 나 스스로 느끼는 내적 친밀감은 더 커져가지만 시간은 야속하게 빠르기만 하다.


육아는 아이를 키우는 일이 아니라,
덜 성장한 나를 마저 키우는 일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어쩌면 아빠와 같은 나의 모습은 아빠의 성장과 함께 아물었어야 하는 나의 성장이었을 수도 있다. 아들과 마주하면서 아빠가 떠올려지는 건 함께 성장하라는 뜻인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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