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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현 Feb 24. 2024

따뜻함과 자본 사이

터미널 쓰레기통 앞에서 남은 생수를 털어 입에 넣었다. 한 중년 남성 분이 집게를 들고 분리수거를 하고 계셨는데 내가 생수통을 들고 고민하자 '아무 데나 버리세요.'라고 했다. 나는 생수통을 던져 넣고 입에 물을 머금은 채로 '음음음음음' (고맙습니다 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남성 분이 호쾌하게 '네~'라고 답해주셨다. 그러니까 굳이 말로 정확하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제스처나 상황이나 느낌만으로도 감사의 말을 전할 수 있다. 어떤 말은 정확히 발화되었음에도 비어 보이고, 어떤 말은 그렇지 않음에도 충만하다. 그런 기운이나 에너지, 세밀하게 느껴지는 정보량으로 판가름되는 인상이 가장 잘 느껴지는 게 공간에 머물 때인 것 같다. 공간을 만들고 운영하는 사람이 나에게 어떤 상태가 되기를 바라고 있구나 하는 것들.


오늘 두 개의 공간을 경험했다. 하나는 최고였고 하나는 아주 힘들었다.


1

오늘 첫 일정으로 다이애나 밴드가 진행하는 퓨어데이터 강의를 들으러 갔다. 퓨어데이터는 프로그래밍을 도와주는 언어이자 툴 같은 건데 특히 사운드나 음악을 만드는 기능이 잘 구현되어 있다. 이 수업을 해준 다이애나 밴드는 최강 예술가 분들인데 음악을 베이스로 하지만 다양한 여러 활동을 하고 계신 분들이다. 그분들을 잘 소개할 자신이 없으므로 아래 포트폴리오 웹사이트로 대체.

https://dianaband.info/


수업은 다이애나 밴드의 작업실에서 이루어졌는데 연희동 홍제천 인근 2층에 있으며 온갖 기계와 식물과 전선들이 희한하게 쌓여있는 곳이다. 오늘은 총 4회 차의 마지막 시간으로 안부를 묻고, 서로 쫌쫌따리 만든 것들을 보여주고, 뭔가 막히고 잘 안되면 다 같이 나서서 해결하고,  이야기하고, 강사이신 원정님이 만드는 사운드에 소박하게 웃는 모임이었다. 비건 음식들을 각자 싸와서 둘러앉아 먹고 따뜻한 차가 계속 다시 채워졌으며 재미있는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모두 나긋나긋한 소감을 이야기하며 즐거웠다고 말하고, 정해진 수업 시간 외에도 또 각자 만든 것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지자고 약속했다. 공간에서 편해지길, 자유로워지길, 자신의 것처럼 이용하길, 머무는 시간 만이라도 기쁘길 바라는 마음이 가득한 그런 시간이었다.

다이애나밴드 작업실에서. 한 분이 생일이셔서 케이크 촛불도 켰다.
퓨어데이터 짱잼

2

저녁에는 소전서림에 갔다. 평론가분들과 함께하는 북토크 행사가 있었다. 소전서림은 청담동에 위치한 전문도서관으로 원래는 연회비를 내야만 들어갈 수 있으나 오늘은 외부에 공개된 행사라 나는 별도 참가비를 내고 들어갔다. 초행길이라 소전서림 입구가 아니라 주택 쪽 입구로 들어가 버렸는데 주차관리인이 어디 가냐고 소리를 질렀다. 겨우 찾은 소전서림 내부는 정갈하고 완벽하게 정돈된 서가와 책상이 있었고 음악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정적에 침을 삼키는 것조차 조심해서 해야 할 듯한 느낌이었다. 직원분께 화장실을 물어봤는데 안내해 주신 곳에 가니 장애인용 화장실밖에 없어 그냥 사용해도 되는 것인지 두리번거리다 결국 손만 씻고 나왔다. 라커를 이용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나도 라커를 이용해도 되는지는 알 수 없어 또 헤매다 그냥 북토크 자리로 들어갔다.


북토크 자리에는 세 대의 카메라와 대여섯 명의 직원분이 또 계셨다. 의자는 서로 가깝게 붙어 있었고 너무 경직된 분위기에 고개 돌리기조차 쉽지 않았다. 평론가분들의 소설 작품 이야기는 재밌었는데 몸이 긴장된 탓인지 뒷목이 너무 뻐근하고 숨이 답답하게 쉬어졌다. 결국 북토크가 얼른 끝나기를 바라고만 있다 끝나자마자 밖에 나와 심호흡을 크게 했고,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소전서림

물론 두 공간의 우열을 나누려는 건 아니고 개인적 선호를 이야기하는 거다. 누구에게나 어릴 적 경험한 자신의 마음속 원형적인 공간 같은 게 있지 않나 싶다. 나의 경우에는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떡집이 아닐까 싶은데 모든 사물이 비정형적으로 놓여있고, 손님들이 찾아오는 이벤트가 계속되던 소중한 곳, 그래서 커서도 반듯하고 잘 꾸며져 사람을 긴장케 하는 곳보다는 그런 따뜻하고 소소한 공간들을 조금 더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 공간에는 운영자들이 만들고 쌓아 올린 시간들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뜻밖의 사람들과 뜻밖의 기회들을 마주치고, 여러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기묘한 상호작용과 따뜻함이 생겨나는 곳. 먼 거리에서, 어떤 날씨에 생각해 봐도 그 공간이 나를 반겨줄 거라는 게 큰 위안이 되는. 무엇보다 나이를 먹으니 괜한 데서 기운 빠지기가 싫다.


이렇게 멋대로 평가해서 죄송할 따름이다. 나도 공간을 운영해 봤기 때문에 사실 공간 운영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란 알고 있다. 한 가지 더 이야기를 해보겠다.


며칠 전 카페에서 Y선생님을 만났다. 서점 운영하면서 같이 협력했던 공간 운영자이자 극단의 대표이신 분이다. 오늘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선생님이란 호칭은 그냥 동료 예술가끼리 하는 호칭이다.) 그분이 운영하는 곳은 작은 소극장으로 내가 있던 서점도 주택과 사무실, 상업시설이 같이 있던 곳이고 그분이 계신 곳도 회사에서 건물에 주택과 카페와 책방, 지하 소극장을 운영했다. 우리는 지역문화재단의 예산으로 협력프로그램을 만들었고 희곡도 읽고 출사도 하고 음악공연도 만들었다. 내가 서점을 그만둔다고 하니 응원한다며 친절하게 메시지도 보내주셨었다.


간단히 근황을 나누었고 나는 왜 서점을 그만두었는지 이야기했다. 내가 그만둘 무렵 Y선생님이 계신 공간을 운영하는 기업도 운영난에 부딪혔다고 했다. 대표와 직원과 파트타이머인 여러 사람들이 임금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파트타이머로 일하는 사람들이 그만둬야 하는 타이밍에 대표가 자신의 월급을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선택을 했는지 대단하다고 말했다. Y선생님은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게요. 그분도 애가 셋인데. 그렇게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졌다.


새삼 이야기하고 싶은 건 공간을 운영하고 유지하는 일은 참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공간을 현상유지만 하더라도 많은 품과 자원이 필요하고 게다가 사람들은 더 나은 것을 계속 원한다. 좋은 공간을 발견하면 가급적 오래 머무르고 싶지만 그럴려면 그 공간이 오래 생존해야하지...  공간으로 돈을 벌어야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결국 어떤 공간은 자본주의적인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돈과 따뜻함을 함께 가질 수는 없을까. 요새는 그 사이 중간 어떤 것을 취할 수 없을지 그런 고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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