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인현 Mar 03. 2024

창작자의 새로운 무기 장착 - Zine 만들기

feat. abc zine project

아, 이제 독립출판물도 너무 흔하고 더 가볍고 간단한 인쇄물 같은 거 만들고 싶다.


언젠가 위처럼 말했더니 지인이 Zine이란 게 있는데?라고 말을 건넸다. 당장 검색해 보니 Zine이란 건 개인 혹은 단체가 독자적으로 제작하는 팸플릿 형태의 출판물을 의미하고, 보통 얇은 소책자에 출판시장에서 나오지 않는 독특하고 세부적인 주제를 다루는 인쇄물이었다. 좀 더 알고 싶다면 아래 링크를 눌러봐도 좋겠다.

종이 위의 서브컬처, Zine

https://visla.kr/feature/130334/


나는 소설도 쓰고 사진도 찍고 영상도 만들고 했지만 표현하고자 하는 개념 -> 문제의식 -> 표현양식으로의 발전과정에서 적당한 도구를 선택했을 뿐이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예술에서 양식이 가지는 중요성도 알고 있다. 어떤 도구를 선택한다는 건 결과물을 채집하기 위한 과정의 변화를 의미하며 그게 의식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흐르게 하기도 한다. (사과를 따는데 집게를 쓸지 낫을 쓸지 가위를 쓸지 손을 쓸지에 따라 변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면 될까)


Zine에 관심이 갔던 것도 새로운 도구를 배우고 실행하는 게 다른 방식의 경험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당장 해봐야지 생각하고 서점에서 모임도 만들고 혼자 이것저것 만들어봤는데 사실 아주 재미있진 않았다. 그때 Zine에서 재미를 크게 느끼지 못했던 건 다음과 같은 이유였던 것 같다.


1. 그래도 이왕 만들 거 잘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2. Zine의 문화를 잘 알지 못했다.

3. 주위에 보여줬는데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4. 만들어서 뭐에 쓰지라는 목적이 불분명했다.


검색으로 찾아볼 때는 참 재미있어 보였는데 뭔가 아쉬웠다. 그렇게 Zine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인 줄 알았으나...


시간이 지나 SNS에서 abc zine project라는 계정을 발견했다.

오이오이, 이 녀석들 진심으로 Zine을 만들고 있잖아?


일단 들었던 생각은 Zine을 엄청 재미있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아서 부럽다였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고 페어도 나가고 그런 것 같았다. 자연스럽게 나도 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때는 서점 운영하고 회사 다니느라 바쁘기도 했고 이들의 활동지가 인천이기도 했고 내가 낄 수 있을만한 틈이 없어 보인달까. 자기들끼리 재밌어 보이는 느낌이라 흥미롭군 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리고 지난 2월 퇴사하고 온갖 재미있어 보이는 모임에는 다 참여하고 있었는데 abc zine project에서 포럼을 개최했다. Zine을 만들고 싶은 사람이나 Zine Spirit을 알고 싶은 사람, 메이커들과 교류하고 싶은 사람들끼리 온라인에서 모여보자는 거였다. 거기에 참여했다가 abc zine project를 운영하는 슈퍼소닉 프로젝트의 김영진, 맹주희, 패치워크의 김해리 세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포럼에서 인상 깊었던 건 이미 생산된 결과물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 완벽주의를 버리고 가볍고 편안하게 창작하기

- 국내외의 진메이커들과 연결되기

- Zine을 만들면서 할 수 있는 일 소개하기 등

Zine이 가지고 있는 커뮤니티와 문화를 소개하는데 집중했다는 거였다. 그 포럼에 이어서 마침 Zine을 함께하는 abc zine camp가 열렸고 나는 이때다 싶어 여기에 합류하게 됐다. 김영진 님이 진행하는 '좋아하는 대상을 디깅 하는 진 만들기' 프로그램이었다.


abc zine project의 본부는 인천 배다리 지역이다. 1호선 도원역과 동인천역 사이인데 내가 살고 있는 서울 성북구에서는 지하철을 타고 편도 2시간이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첫째 날에 마침 비가 왔는데 우산이 없었고, 시간도 조금 늦어 나는 황망한 마음으로 이들의 본부를 찾아갔다.

패치워크라는 이름이 새겨진 건물은 1,2층이 동양가배관이라는 카페고 3층에 프린트아웃이라는 Zine 메이킹을 하는 공간이 있었다. 안에서는 운영진들이 수집하거나 여기서 만들어진 zine들을 열람해 볼 수 있었고, Zine을 만들기 위한 각종 도구가 있었다. 영진님이 차분하게 Zine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을 소개했고, 각자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한 다음 어떤 관심사가 있는지 이야기했다. 참가자는 나 포함 네 명이었고 각각의 관심사는 이랬다.

- 텃밭을 가꾸면서 만나는 지렁이, 두더지, 땅에서 줍는 것들

- 어느새 모으고 있었던 예쁜 조개

- 매일 루틴처럼 반복된 일상을 보내는 할머니

다들 귀엽다고 생각하며, 사실 나 빼고 다 여성분들이라 더 그랬지만, 이상한 주제들만 떠올라서 괴로워하다 '파사드 연구회'를 만들어보겠다고 했다. 나는 낯을 가려서 혼밥을 해야 할 때 식당 앞에서 가게 전면부를 열심히 관찰하곤 했다. 그래서 가게 전면부인 파사드만 보고도 가게의 여러 요소를 추리하는 기술을 갖게 된 이야기였다.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에 모두 꺄르륵하면서 재밌을 것 같다며 좋아해 주셨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편안하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 사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나 포함 거기 모인 사람들은 좋아하는 것을 마음 편히 꺼낼 수 있다면 뭐든 꺼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바로 제작에 들어갔다. 나도 열심히 사진을 모으고 내용을 정리했다. 가장 좋은 점은 막 할 수 있다는 거였다. 책에 바로 글씨를 쓰고 사진을 오려 붙이고, 색칠을 한다. 간격이 안 맞아도 되고 다른 종이에 써서 잘라 붙여도 그만이고 찢어도 그만이고 여백을 다 채우든 비우든 그것도 내 마음이었다. 제본 또한 실과 바늘을 이용하거나 스테이플러를 이용해 간단하게 마무리한다.

사실 나에게는 익숙지 않은 형식이다 보니 중간중간 이런 생각이 들긴 했다.

- 정말 이래도 되나?

- 이게 괜찮아 보일까?

다행인 건 운영진 분들 포함 Zine을 만들고 계신 분들을 만나게 되면서 (다른 모임에 참여하신 분들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다들 정말 제멋대로 만들고 있구나!라는 걸 몸소 깨달았다. 아무도 어떤 표현방법에 대해 평가하거나 고치려는 시도가 없고 재밌어하고 긍정해 주는 분위기를 온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그래서 3회 차 중 2회 차가 넘어가면서부터는 이래도 되겠다를 넘어 이것 봐, 이건 어때? 같은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 이렇게 다양한 형태로 Zine 만드는 사람들이 많은지 처음 알게 되었고, 각자 만든 Zine을 소개하고 Zine을 교환하고 Zine을 주제로 다양한 사람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매력적임을 느꼈다. 이때쯤 해서 내가 혼자 Zine을 만들며 재미를 느끼지 못했던 이유를 새삼 깨닫게 되었고 Zine을 만든다는 건 다음과 같은 일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1. 잘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떠오르는 대로 표현하자.

2. 여러 사람과 같이 커뮤니티를 이뤄 만들자.

3. 서로의 작업물에 열렬한 찬사와 피드백을 보내자. 

4. Zine을 보여주고 교환하며 내 세계를 넓히자.


아마 위와 같은 원칙을 세우고 실행까지 옮기기까지는 운영진 분들의 고민과 노력이 많았을 것 같다. 그걸 해내는게 이들이 똑똑이라는 증거같기도 하고. 창문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도촬했다. 브랜드를 만들며 했던 고민들 같은데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어쨌든 마지막 시간에 이르러 드디어 각자 완성된 Zine을 가지게 되었다. 완성된 Zine은 원본을 가지기도 하지만 스캔 및 복사하여 1부는 본부에 보관하고 1부는 집에 가져갈 수 있었다. 다른 분들은 정말 어쩜 귀염뽀짝하게 잘 만드는지 재주도 참 많다고 감탄했다.

나는 당초 계획했던 파사드 연구회 Zine을 완성했다.

이게 뭐야 싶다면 성공이라고 본다. 낄낄.

그리고 처음 가보게 된 인천 배다리 지역을 워크숍이 끝날 때마다 조금씩 돌아다녔는데 거기서 찍은 사진으로 하나를 더 만들었다. 이름은 Bad Baedari. 밤에 돌아다니니 좀 무섭고 이상해서 그렇게 지었다.


마지막으로 서로의 작업물을 돌아가며 소개하고, 소감을 말했다.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의 지지를 동력 삼아 무엇이든 만들어볼 수 있는 분위기를 체험한 것이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일의 가치와 힘을 느꼈다. 참여자 모두 서로 응원을 남기며 헤어졌는데 물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건 비용이 들고 일시적인 기회일 수 있지만 이 과정을 통해 Zine을 만들고 있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획득하고 커뮤니티 안에 속해있음을 확실하게 느껴볼 수 있었기에 값진 경험이었다. 물론 여건이 된다면 다시 또 배다리에서 Zine 만들기에 참여할 것이다. 아니라도 Zine을 만들고 있다 보면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좋은 예감이 풍겼달까... 위급할 때 풀어보라고 비법서도 주셨다.


이상 후기를 마무리한다. 지금까지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면 아래 정보들을 통해 Zine 만들기에 참여해 보길 바란다! 물론 내가 만든 Zine에 관심이 있거나 함께하고 싶다 궁금한 게 있다 이런 것도 환영이다.


abc zine project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abc_zine_project/


패치워크 홈페이지

https://patchwork.incheon.kr/


슈퍼소닉 스튜디오 인터뷰

https://blog.naver.com/designpress2016/223165711084



매거진의 이전글 불편한 이야기를 해보자,「헌치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