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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현 Mar 08. 2024

자투리 950

네이버 지도 위성사진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950번지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서울 지하철 6호선 월곡역 인근이다. 월곡역 하나 전인 고려대역에서 월곡역까지 가는 길에는 정릉천이 길게 연결되어 있어 나는 종종 그 길을 걷곤 했다. 하루는 우연히 정릉천 밖 인도를 걷다가 낯선 땅을 발견했다. 도로 안쪽으로 발을 내딛으니 관공서에서 만들어 놓은 녹색 펜스가 나타났다. 재활용쓰레기 처리장에서부터 아파트까지 대략 200m 정도의 거리에 왼쪽에는 펜스로 막힌 빈 땅, 가운데에는 조경이 적당히 되어 있는 산책길, 오른쪽에는 텃밭, 텃밭 너머에는 국방연구원에서 쳐놓은 담벼락이 있었다. 흥미로운 건 물론 빈 땅이었다. 그 땅에는 오래전 사용되다 버려진 듯한 누워있는 농구대, 테니스 네트, 평행봉 등이 있었고, 식물들이 마구잡이로 자라 있었다. 펜스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다 발견한 안내문을 통해 이 땅이 SH 서울주택도시공사의 소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출입문은 잠겨있었지만 CCTV가 있고 쓰레기가 없는 걸 봐서는 관리가 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던 땅에 자꾸 가게 되었고, 아무 용도도 없이 버려져 있는 그 땅이 묘한 위로가 된다는 걸 알았다. 인간이 없는 땅에 난 식물들도, 미관 따위와는 상관없는 것도, 그 땅의 쓸모와 용도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찾아보니 홍릉 일대 도시재생활성화계획에 포함된 첨단의료기기개발센터 조성사업 계획이 있었다. 계획상 사업기간은 2020년부터 2025년까지였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사업은 진행되지 않은 듯하다.

대한민국의 땅 활용

서울도 메가시티에 이르는 규모가 되면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고 있고, 그중 하나가 지대상승이다. 한정된 자원인 땅과 폭발적인 수요로 높은 가격을 형성하는 원리는 어떻게 보면 당연한 원리일 것이다. <서울해법>이란 책에서 땅의 활용은 용도에 관한 복잡한 제도, 건축법, 각종 조례의 틈을 피해 최대한의 임대수익을 낼 수 있는 수익 계산 등 땅이 이미 가지고 있는 한계를 최대치로 발휘하여 생성된다고 밝힌다. 그러한 점 때문에, 특히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어떤 땅의 가치는 그곳을 어떻게 사용하든 이미 정해져 있는 정답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최근처럼 부동산 시장이 불황이고, 건축비가 엄청나게 상승한 상황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만약 그런 가운데에서도 오답을 실행하려는 사람이 있다면(수익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지 않는 다른 방법을 구상한다면) 그는 공공기관이거나 위대한 비전 때문에 막대한 수익을 포기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에서 놀고 있는 땅이 있다면 흥미롭다. 놀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떤 무형의 계획이 세워져 있고, 미래의 쓸모를 향해 나아가고 있을 확률이 무척 높지만.


다른 상상력은 가능할까.

청량리동 950 땅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아녜스 바르다의 다큐멘터리 영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를 보면 과일, 채소, 곡식, 도시의 가전, 가구 등 소유권이 명확하지 않은 것들을 주워서 활용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어떤 과수원주인은 과수원의 일정 분량을 수확하지 않고 남겨놓고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따갈 수 있도록 한다. 땅에 관해서는 어떨까. 땅은 SH라는 소유주가 존재하지만 어떤 이유로 활용하고 있지 않는 땅이다.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는 시민들은 어떤 일도 없을까. 길이 삶에 밀접하게 닿아있다고 믿는 사람에게도 아무런 권리가 없을까. 


약 2년간 구경만 하다 눈이 오는 어느 겨울날 카메라를 들고 가 사진을 찍었다.


24년 2월 18일


일단 기록하기

청량리동 950 땅을 2023년 함께하는 식물답사 동료들에게 소개했다. 당시에는 빈 땅에 방치된 식물들이 있었고 이 식물들을 한번 보자는 생각이었다. 식물 답사하는 동료들은 도시의 식물들을 관찰해 보자는 목적으로 만났던 사람들인데 도시의 곳곳을 정기적으로 답사하다 보니 식물 외에도 다양한 도시적 문제들에 관심을 가지는 모임이 되었다. 


24년 3월에는 내가 주도하여 청량리동 950을 다시 방문했다. 아마도 어떤 필요에 의해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할 확률이 높은 이 땅에 관한 무언가 행동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장의 해결책은 없었고 각자 아이디어를 내고 이 땅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나는 일단 계절별로 정기적으로 이 땅에 관한 기록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왜 이 땅에 관심이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 기록들이 나중에 무엇을 증명해 줄지는 모르겠다. 


24년 3월 8일


지난번 모임에서 팀원분이 이 땅의 이름을 자투리 950으로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 이름이 꽤 마음에 들었다. 자투리라 하면 

1.      복식 자로 재어 팔거나 재단하다가 남은 천의 조각. 자투리 무명.

2.      어떤 기준에 미치지 못할 정도로 작거나 적은 조각.      

을 뜻하는데 이 땅의 모양새가 딱 그렇기 때문이다.


혹시 관심 있는 분은 함께하자. 

연구를 한다거나 기록을 함께하거나 좋은 아이디어가 있거나 등등.

댓글 혹은 아래 계정으로 연락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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