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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디 Nov 05. 2023

27번째 결혼기념일을 챙겼다.

다시 여름이 온 듯 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는 요즘과 달리 27년전의 이맘때는 제법 쌀쌀했다. 하늘은 눈부시게 파랗고 공원에는 노란 은행잎이 쌓여있고 찬바람이 옷깃을 여미게 하는 진한 가을날 우리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딱 한번 대판 싸웠던 해를 빼고는 27년째 해마다 그날을 기념하고 있다.


남편은 무슨무슨 기념일을 아주 피곤해 하는 사람이다. 어디에서 들었는지 '여자들은 기념일을 꼭 챙겨줘야 한다더라.'하며 엄청 부담을 느낀다. 나로 말할 거 같으면 내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남편이 챙기나 안챙기나 모른 척 하고 있다가 안챙겨주면 토라지는 스타일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며칠전부터 동네방네 광고를 하고 원하는 선물을 미리 골라 요구하는 편이다. 선물도 절대 비싼 물건으로 고르지 않는다. 남편과 아이들의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 품목과 가격을 정해서 미리 알려주니 따로 고민할 필요도 없게 만든다.


딱 한번 대판 싸웠던 그때, "결혼기념일을 왜 꼭 남자만 챙겨야돼?"라고 했던 남편의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힌 후 나는 결혼기념일을 일부러 잊어버리려고 애썼지만, 남편과 달리 무슨무슨 기념일에는 며칠전부터 마음이 붕붕 떠다니는 내가 결혼기념일을 잊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명품백을 사달라는 것도 아니고 근사한 이벤트를 바라는 것도 아닌데, 그저 분위기 괜찮은 곳에서 함께 저녁을 먹으며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정도면 되는데 남편의 어이없는 말에 '내가 다시는 결혼기념일을 챙기나 봐라.'했었다.


27년을 함께 살다보니 사실 둘이서는 할 얘기도 그리 많지 않다. 둘이서만 보내는 저녁시간의 분위기가 어떨지 뻔히 알면서도 결혼기념일을 그냥 보내는 건 어쩐지 서운하고, 근사한 레스토랑에 예약을 해주겠다고 나서는 딸아이의 성화에 못이겨 함께 저녁을 먹기로 약속했다.




결혼식을 공원안에 있는 예식장에서 올려서 그런지 그날이 되면 단풍으로 물들었던 그때의 풍경이 떠오르며 나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그래서 결혼기념일에는 남편과 가까운 야외로라도 나가고 싶지만, 운전을 유난히 싫어하고 기념일 챙기는 걸 의무로 생각하는 남편은 그저 저녁외식 정도로 방어전을 치르려고 할 뿐이다.


저녁식사를 기다리며 하루종일 집에 있다보면 부아가 치밀어 저녁까지도 망칠 수 있기에 나들이 가자는 언니를 따라나섰다. 놀러다는 걸 나만큼 좋아하는 조카에게 운전을 시켜 단풍이 한창인 북한산 근처의 한옥카페에 갔다. 커피를 마시고 실컷 수다를 떨면서도 머리속에는 결혼기념일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서울시내에도 이렇게 좋은 곳이 많은데 오늘같은 날 같이 이런 데라도 나오면 얼마나 좋아?"

"야, 너도 참 징하다. 이제 그만 포기할 떄도 되지 않았니?"


27년동안 동생이 남편에 대해 투정하는 소리를 옆에서 들어온 언니가 팩폭을 날렸다. 맞는 말인데 나는 그게 왜 그렇게 안되는지 모르겠다.


실컷 놀고 저녁시간에 맞춰 집으로 돌아와보니 남편이 들어와 기다리고 있었다. 식탁위에는 예쁜 꽃다발도 놓여있었다. 꽃집 앞을 지나며 '결혼기념일을 왜 남자만 챙겨야 하냐'고 했던 남편의 말이 떠올라 남편에게 줄 작은 꽃다발을 샀던 참이었는데, 27년을 같이 사니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것이 있구나 싶었다. 하루종일 밖에서 놀다가 들어왔더니 다시 나가기가 귀찮았지만, 저녁을 먹으러 나가려고 옷도 안갈아입고 기다리는 남편을 봐서 함께 밖으로 나갔다.


딸아이가 큰맘 먹고 예약해주겠다던 비싼 레스토랑을 마다하고 집 근처 자그마한 식당으로 갔다. 이제 돈을 버는 직장인이니 엄마 아빠를 위해서 뭔가 해주고 싶어하는 마음은 고맙지만, 딸아이에게 돈을 쓰게 하는 것이 어째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렇게 호의를 거절하다가 다시는 안해준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아이가 내주는 돈으로 한끼에 30만원 가까이 되는 식사를 하면 소화도 안될 것 같았다.


아담한 식당에 남편과 마주 앉아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이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자기는 나랑 살면서 뭐가 제일 좋아?"

"안정적이고 애들 잘키우고 음식도 잘하고, 그런거지 뭐."

"나한테도 자기랑 살면서 뭐가 제일 좋으냐고 물어봐야지."

"싫어, 안물어볼래."


'애들 잘 키우고 음식 잘하고...' 같은, 옆집 여자도 뒷집 여자도 다 하는 그런거 말고, '나'라서 좋다는 말을 기대했는데 역시나 무리였나보다. 그리고 이참에 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남편은 좋은 말이 안나올거라 생각했는지 말을 꺼내보지도 못하게 벽을 쳤다.


더 나은 부부관계를 위해서 끊임없이 대화하고 서로 노력해야 한다는 내 생각과 다르게 남편은 그런 대화를 몹시 불편해했다. 그래서 남편과 얘기를 하고나면 내 마음속에 늘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남아 있는 거 같아 답답했고, 마지막은 늘 어색한 분위기로 끝났었다.


그동안은 불편해 하는 남편을 끝까지 붙들고 이야기 하려고 해왔지만, 이제는 그의 방식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힘들지만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을 수는 없으니까 '저 사람은 왜 저렇지?'가 아니라 '저 사람은 저렇구나.'로 마음을 바꾸기로 했다. 27년동안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거라면 접는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이 원하는 깊이만큼만 들어가니 그날은 마지막까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끝났다. 내 마음속에 답답함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 무게가 예전만큼은 아니었다. 27년동안 깎이고 다듬어져 이제는 내 안에 품고 살만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도 오고 해서 나가지말고 집에서 먹자고 할까 했었는데..."하는 남편의 말에 서로 말하지 않아도 찌찌뽕하는 우리는 어쩔 수 없는 부부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28년이 되는 내년 결혼기념일에도 우리는 또 저녁을 같이 먹을 것이고, 개운치 않은 대화를 나눌 것이고, 그렇게 서로 나이들어가고 있음을 확인할 것이다. 문득 그렇게 30년이 되고 40년이 되고, 50년을 채워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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