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N Jul 29. 2021

구글 포토 비우기

추억팔이 고맙다 이 영악한 놈들아

언젠가부터 이메일이 안 온다 싶더니, 구글 포토 정책 변경 때문이었다. 몇 년에 걸쳐 쌓아둔 사진들의 용량은 더 이상 0 byte로 취급되지 않고 제각기의 무게를 갖게 되었으며, 그 용량들이 꾸역꾸역 15GB라는 빈 공간을 채우다 넘쳐 그만 지메일 우편 보관함의 실낱같은 빈 틈까지 싸그리 채워버린 것이었다.


한 달에 2400원씩만 내면 너의 추억을 상처없이 고이 모셔두겠다는 Google One 요금제의 협박이 달콤하기는 했지만, 나에겐 다행히 무료로 쓸 수 있는 다른 클라우드가 있었고, 또 다행히 Google takeout이라는 기능이 (숨겨져 있었지만) 남아있었기에 어찌저찌 구글 포토의 모든 사진을 백업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사진만 지우면 모든 것이 원래대로 굴러갈...것 같았지만 애플이랑 쌍벽을 이루는 이 마귀같은 놈들은 역시나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구글 포토에는 '전체 삭제' 기능이 없다.

(심지어 Shift버튼으로 여러 항목을 선택할 수는 있지만 오른쪽 스크롤바를 이용하는 순간 풀린다. 첫 사진 누르고 Shift누르고 끝 사진 눌러서 전체 선택하는  일부러 막아둔거다.)

기억도 없이 쌓여있는 이 수많은 사진을 하루 치씩 지우는 작업을 이천 번 정도 반복하는 개고생을 하고 싶다면 2400원을 내지 않아도 좋다는 또 한 번의 꼬드김. 그러나 다행히 마왕이 있으면 용사도 공존하는 법. 프로그래머들은 이 단순노동을 자동으로 진행시켜주는 코드를 짜서 배포해두었다. 처음에 조금 버벅였으나 언어 설정을 영어로 바꿨더니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 인공지능 놈들이 농땡이 피우지 않고 성실히 업무에 임하는가를 굳이 지켜볼 필요는 없겠지만, 마땅히 할 일도 없었기에 캠프파이어 불멍하듯이 서른 장씩 타들어가는 사진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사진들은 시간을 거슬러가며 내 눈을 스쳐갔다. 지난 주에 갔던 제주도 사진부터 시작해서 각종 인터넷 유머글, 귀여운 동물, 사랑하는 사람들, 좋아했던 연예인, 공부했던 문제집, 게임 스크린샷, 카톡 캡쳐, 의미없는 사진들, 맛있는 음식, 연주하거나 관람했던 공연, 축제의 현장, 책의 인상깊은 구절들, 여기 저기 여행다닌 사진, 빡빡머리 군인 사진, 교생실습 때 사진과, 같은 학교에서 보냈던 고등학교 시절의 사진들... 그렇게 쌓여온 역사는 두 시간 정도를 거쳐 중학교 3학년 때 찍었던 가족사진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그렇게 자세히 감상하지는 않았으나 시간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한 편의 다큐멘터리 같은 구성이었다. 대부분의 다큐멘터리가 그렇듯 크게 극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소용돌이 속에서 정신없이 발길질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지난 날의 서사들도 이제 와 이렇게 보니 (아무튼 내 삶이라는 사실을 차치하고 생각해보면)그렇게 특별할 것은 없어보였다. 내가 폭풍우라고 생각하며 그동안 맞서왔던 것들은 사실은 캐리비안 베이에서 육만 원 내고 즐기는 파도 풀장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나한테는 마냥 새롭고 특별해보이던 빛나던 말들과 쓰라린 시간들은 옛날 노래 가사처럼 결국 누구나 한번쯤 겪는 그런 일이었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근래의 내 모습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왜 글을 쓰지 않을까? 주변에서 글을 쓰라는 이야기를 할 때도 어물쩡 넘어갈 수 밖에 없었을까? 시험만 끝나면 즐겨야지 벼르며 사두었던 그 많은 책들과 게임들은 왜 손이 안갈까? 기껏 영화나 드라마 정주행하겠다고 스트리밍 사이트 결제를 다 해두고 매일 무의미하게 짧은 유튜브나 틀어놓는걸까?

답)새롭지가 않다.

(그 어느 해보다 새로울 일이 많을 시기임에도 그렇다.)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감정이 내 안에서 피어나지가 않는다.

(아마 시험에 붙고 난 다음부터인 것 같다. 인형뽑기 중독의 끝은 수만 번 인형을 놓칠 때가 아니라 막상 뽑고나서 보니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때 온다.) 글이라는 걸 쓸 때는 그래도 내가 느낀 무언가를 알리고 싶다는 욕망이 어느 정도는 기저에 깔려있어야하는데, 내 삶의 자그마한 순간들이 굳이 남한테 전달해야 할 만큼 독특한 것으로 인식되지가 않는다. 책도 게임도 영화도 더 이상 그렇게 새로운 자극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별로라는 건 아니다. 좋긴 좋은데...) 거기에 길기까지 하면 괜히 피로하다. (그럼 운동은 생전 안했으니 새로울텐데? 그건 맞는데 그냥 게으르고 기초 체력이 딸린다.)


지난 주에 제주도에 다녀오며 느꼈지만, 이젠 여행도 편안하다. 바꾸어 말하면 두근거리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비행기에서 잠시 읽었던 <여행의 이유(김영하)>에 따르면 여행은 실패하기 위해 가는 것이라던데, 그 표현을 빌리자면 나의 여정은 더 이상 실패할 일이 없어보여 박진감이 부족한 지도 모르겠다. 물론 여행 일정에 차질이 생기는 경우도 있고, 주식이나 코인에 잘못 투자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는데, 그게 '실패'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무슨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고 싶다는 건 전혀 아니다. 특히 나나 주변 사람들의 생명에 위협이 갈만 한 그런 일만은 없었으면 좋겠다. 대학교 시절에는 딱 지금의 내 나이쯤 되면 사고든 뭐든 해서 단명하지 않을까 쉽게도 떠들고 다녔는데, 이제는 오래 살고 싶다. 다행히 첫 고속도로 주행도 무사히 마쳤고 화이자 백신도 별 탈 없이 잘 맞았고 하니 올해는 별 문제 없지 않을까?이렇게 글을 써두는게 너무 복선같이 느껴지긴 한다.)


새로운 경험을 해야 그 과정 속에서 실패도 경험하고 그 실패 속에서 무언가 생의 감각이 고개를 내밀 것 같은데, 그런 자극이 부족하다. 새로운 사건이 없는 건 아니다. 첫 중학교, 첫 운전, 새로 아이패드 드로잉 클래스도 듣고 있고 그 외에 말하기는 미묘한 처음 겪는 일들도 아주 많다. 그저 내 마음이 지금 심각하게 늙어 있을 뿐이다.


글을 쓸 때 결말을 생각하지 않고 써서 어떻게 끊어야 할 지 모르겠다. 아무튼 더럽게 귀찮았지만 덕분에 간만에 뭐라도 글을 싸게 해준 구글 놈들 장사전략에 자그마한 감사를 표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28.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