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 다리미로 옷 주름 펴는 거나 와이셔츠 목 때 제거하는 일은 그래도 나름의 쾌감이 있는데, 양말 짝 찾아서 정리하는 건 아무리 생활밀착형 사천성 게임이라고 스스로를 세뇌해봐도 지루하고 영 재미가 없다.
이제 빨래 건조도 건조기가 해주고, 설거지도 식기세척기가 해주고, 청소도 로봇청소기가 해주고, AI스피커한테 말만 하면 뭐 커튼도 쳐주고, 불도 꺼주고, 창문도 열어주고, 노래도 불러주고 다 하는데 왜 양말만 못개는거니 AI야..
아직 AI한테 같은 종류인 양말을 인식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거겠지? 하긴, 양말은 구겨져있거나 뒤집혀있을 때도 많고, 다른 방향에서 보면 모양도 달라지니 같은 걸 찾기가 좀 어려울 거 같긴 하다. 그래도 어디 로그인할 때마다 보안 점검한다고 '신호등을 찾으세요', '오토바이를 모두 클릭하세요' 이런 거 뜰 때 꾸준히 열심히 해주면, 나중에 '같은 양말을 찾으세요'도 뜰거고 그 시기가 지나가면 드디어 양말 개는 AI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을까?
칸트 철학 생각도 조금 했다. 인간은 사물을 볼 때 물자체(noumenon)를 보지 못하고 현상(phenomenon)으로만 인식하기 때문에 양말이 완벽하게 합동인 모양이 아니더라도 두 양말을 같은 것으로 범주화할 수 있는데, AI는 못하는 걸 보면... 어쩌면 AI의 눈으로 보는 세상이 오히려 인간의 편견이 배제된 물자체인 것은 아닐까? 세상에 사실은 똑같은 양말 따위는 없는 거 아닌가? 양말이란 무엇인가...
어휴... 그거 전혀 아니었다. 잠깐 검색해보니 요즘 한창 잘나가는 AI 녀석은 이미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을 기를 쓰고 베껴서 따라하고 있었다. 짝이 맞는 양말을 매칭하는 기술도 이미 3년 전에 만우절 장난 레벨에서 얼추 쓸만하게 개발되어있었다.(https://blog.ml6.eu/mlsox-explained-411ab8b14884)
에엥? 그러면 왜 아직도 우리집엔 양말 개는 기계가 없는거여? 진작에 LG에서 한 두 개 쯤은 나왔을 법도 한데...아니면 뭐 CES 같은데 나오기 너무 좋은 제품 아닌가? 찾아보니 빨래 개는 기계는 역시나 CES2018에 나왔었고 LG에서 다른 거 미리 특허출원도 해놓기는 했단다.(https://youtu.be/a4UF0dRS99Q?si=o3JjRiOeNYNFCR7a) 근데 양말이랑 속옷은 안된단다. 왜죠? 양말도 이제 매칭할 수 있는데? 대답해주세요!
(출처: 뤼튼 GPT-4.0)
그렇다고 합니다.
색상 구분이나 패턴 구분도 좀 더 디테일해질 필요가 있겠지만, 양말 두 개를 잘 찾아냈다 하더라도 그걸 가져와서 하나로 모아서 말아낸다는 게 생각보다 로봇한테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것.
생각해보니까 그러네. 나는 AI 로봇이 똑똑한 지 아닌지를 생각할 때 인지 기능만을 생각하고 있었구나. 오히려 AI 로봇의 입장에서는 신체 기능 쪽이 훨씬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인지 기능(대충 전두엽 근처의 몇몇 기능)이 발달해 온 역사보다, 아마 분명히 신체 기능을 고도화하고 정교화하며 발달해 온 역사가 더 길 테니까. 조금 더 긴 수준이 아니라 몇백 배 이상 길지 않을까?그걸 생각하면 AI 입장에서도 인지 기능을 따라하는 쪽이 훨씬 수지타산이 맞을 것 같다.
AI가 인간을 지배할 거라는 이제는 막연하지 않은 불안감과, 당장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예측했던 직업들이 빠르게 공격당하는 현실 속에서, 그래도 그나마 베끼기 어려운 인간의 고유성은 무엇일까? 마틴 포드(로봇 규칙: AI는 어떻게 모든 것을 변화시킬까)에 따르면 깊은 수준의 창의성, 인간 관계에 관한 이해, 그리고 이동성, 순발력 등의 신체 지능이라고 한다. (https://www.bbc.com/korean/articles/c51lkkwk08ko.amp)
우리 나라의 교육은 지식 전달 중심이 아닌 역량 중심으로 나아가자고 슬슬 기조를 바꾸고는 있는데, 과연 어떤 역량이 정말로 미래 사회에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쩌면 푸리에 변환 방정식을 풀고 리만 가설을 탐구하는 일보다 양말을 개고 냉장고를 정리하는 일이 더 미래 사회에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은 핵심 역량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