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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Sep 26. 2021

프롤로그 (1); 왜 일리아스인가

-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ILIAS)』 -

  책을 읽는다는 것이 점점 우스워지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우스워진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게, 독서에 취미가 좀 있다고 하면 요즘 시절에 고상하다며 살짝 비꼬는 사람부터 그 재미없는 책을 어떻게 읽을 수 있는지 건성으로 지나가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는 책만 보면 잠이 쏟아진다는 것을 거의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까지 있으니 말이다. 독서가 자랑거리가 될 순 없어도 인생 참 재미없게 산다는 연민거리가 되어버린 지금 사람들에게 책 읽는다고 말하기도 좀 거북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이게 다 책보다도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것들이 세상에 넘쳐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과 컴퓨터, TV 등과 같은 괴물들. 괴물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것이 그들의 포식성은 실로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괴물들은 수많은 콘텐츠를 양산한다. 게임, 영상물, 각종 SNS, 드라마, 웹툰과 같은 괴물들이 낳은 더 강한 괴물들은 사람들의 시간을 가져간다. 만일 이런 것들을 사람들로부터 빼앗아 버리면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책을 조금은 읽지 않을까.     


  확실히 요즘에는 많은 사람들이 독서와 같은 진입장벽이 높은 즐거움은 거부한다. 반면에 진입장벽이 낮은 컴퓨터 게임, 유튜브 시청과 같은 쾌락에는 쉽게 중독된다. 그게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진입장벽이 높다는 것은 내 것으로 만들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내 것이 되면 순수하고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행복으로 충만해진다. 나는 진입장벽이 높은 즐거움을 해자가 있는 즐거움이라고 말하고 싶다. 적의 침입으로부터 성을 방어하기 위해 성 주위에 구덩이를 파고 물을 채워 넣은 해자처럼, 해자가 있는 즐거움은 웬만해서는 그 즐거움의 색이 바래지지 않는다.      


  옛날에 독서할 수 있는 인구는 먹고 사는 게 어느 정도 해결되는 계층에서나 가능했다. 풍족한 생활을 누리지 못했던 경제적 하위계층은 빵을 구하기 위해 책을 가까이 할 시간이 없었다. 조선시대와 같은 신분제 사회의 경우에는 양반이 아니라면 원천적으로 독서 자체가 불가능하거나 글을 안다고 해서 신분의 사다리를 걷어찰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요즘은 이래나 저래나 책은 소외되고 버려진다. 그러다보니 유튜브 영상 시청과 같은 것들이 독서를 대신할 수 있는 많은 장점이 있다는 의견도 등장한다. 까자니 라떼가 될 것 같고 동의하자니 좀 그래서 그냥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라고 열어두는 걸로 생각을 정리한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사회가 아니던가.     


  하물며 책읽기가 이러한데, 『일리아스(ILIAS)』는 또 무언가. 독서동아리 회원이 묻는다. 동기 좀 주세요. 왜 이런 책을 읽어야 하는 거죠? 그렇게 갑자기 치고 들어오면 내 머리 속도 하얘지고 만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일리아스』 이전에 나는 왜 책을 읽어왔을까. 그 이유를 새삼 정리해본다. 첫째, 나는 낯선 곳을 사랑한다. 책읽기는 나를 낯선 장소와 시간으로 데려가준다. 나는 크레테섬에 갈 수도 있고 기원전 12세기를 살 수도 있다. 둘째, 사람이 자신만의 가치관이나 생각이라는 것을 가지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이 필요한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게 독서와 여행이라는 생각이다. 독서가 앉아서 하는 여행이고 여행이 서서 하는 독서라고 불리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셋째, 책을 읽으면 너무나 괜찮은 사람을 자주 만난다. 스승일 수도 있고 개성으로 똘똘 뭉친 이례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이방인』의 뫼르소, 『설국』의 고마코, 어린왕자,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 『인간실격』의 요조, 다산 정약용,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플로렌티노 아리사, 맹자, 체사레 보르자, 밀란 쿤데라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주인공들 등등. 현실에서 이렇게 매력적인 사람들을 만나기는 쉽지가 않다. 이유를 적어보니 나는 왜 여행을 좋아하는가, 에 대한 답이 될 수도 있는 것 같아 조금 놀랍기도 하다.     

[그림출처: YES24]

  그렇다면 왜 『일리아스』인가, 에 대한 나의 대답도 같을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래도 이 책을 위한 이유를 덧붙여보아야 할 것 같기는 하다. 『일리아스』를 읽는 건 방금 나온 따끈따끈한 신인작가의 소설 한 권 읽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독서의 시작이 보고 싶은 것 중심으로 닥치는 대로 시작해도 되지만 점점 더 가치 있는 책을 골라가며 읽어나갈 필요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인생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양서만 읽어도 인생은 너무나 짧다. 숨막히도록 가득가득 높이높이 책으로 꽂혀진 서점을 보면 그렇게도 슬펐던 시절도 있었다. 저걸 언제 다 읽을 수 있을까. 요즘은 슬픈 감정 대신에 조금 약아져야 된다는 생각으로 책들을 마주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리아스』를 읽어야 하는 이유가 나온다.     


  그리스의 원류, 좀 더 나아가 서양문화의 시원을 알고 싶다면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를 읽는 것 만큼 좋은 선택이 없다. 그의 책은 기원전 8~6세기경에 쓰여졌다고 하니 그렇게 오래된 서사시는 또 없기 때문이다. 호메로스는 기원전 8세기 말에 활동했다고 보고 있고, 구전으로 전해지는 그의 텍스트가 기원전 6세기 말 페이시스트라토스가 통치하던 시대에 호메로스 낭송이 국가적 제전의 중요 행사가 되어 올바른 텍스트의 완성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고 하니 적어도 6세기 말에는 제대로 쓰여졌다, 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라고 천병희 선생은 말한다. 서양 근대 철학자 화이트 헤드(Alfred N. Whitehead)가 ‘서양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남겼듯이, 서양 문화의 처음을 찾아가려면 그냥 호메로스 원전을 읽으면 된다. 그 이후에 나온 책들은 호메로스의 각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 이후의 책들을 읽지 말자는 소리가 아니다. 오래된 책 중심으로 순서대로 읽는 게 가장 좋다. 앞의 책을 읽으면 뒤에 나온 책이 읽기 한결 편하다. 어차피 뒤에 산 사람들은 앞에 산 사람들의 책을 참고하고 썼을 테니깐. 고전을 읽는 이유는 사실 이렇게 간단하다. 독서시간을 절약할 수 있고 갈팡질팡할 수도 있을 개념적 혼란도 줄일 수 있다. 그러할지니 서양문학을 읽겠다, 라는 결심이 서면 호메로스부터 시작하는 게 맞다. 다음으로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를 읽고 아이스퀼로스 비극, 소포클레스 비극, 에우리피데스 비극,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등을 차례대로 읽어나가면 되는 것이다.     


  사실 개인적인 사유로는 인식욕도 크다. 그 때 그 시절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알고 싶은 욕구가 가슴 속에서 모락모락 솟아나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호메로스의 고전을 읽으면 인간의 보편적인 삶과 총체적인 인간 정신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 사는 데는 다 똑같다, 라는 말의 의미를 절감하는 순간이다. 2500여 년 전의 사람이나 지금 사람이나 하는 짓이 비슷하고 감정의 표출이 비슷하니 경제, 문화적으로 발달했다고 해서 지금 사람들이 뭐 그리 대단하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저 똑같은 인간군상이자 사피엔스일 뿐이다. 또 거기에 등장하는 수많은 신들의 말과 행동은 얼마나 단순하고 인간적인가. 어린아이 같이 보이기도 하고 미성숙한 인간 같이 보이기도 하고 때론 귀엽기조차 하다. 헤카톰베(제물)을 바치지 않는다고 거대한 폭풍우를 내려치며 항해를 방해하는 객기를 보이는 것은 지인 결혼식에 한 가족 전부가 참가해놓고 달랑 부조 오만원만 했다고 욕하면서 그와는 다시는 말 섞지 않겠다는 지금의 우리 인간들이랑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공자도 육포를 가져다 바치는 사람에게 더 정성스럽게 가르쳐주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백안시(눈 흰자만 보여줌)하는 죽림칠현 완적도 술과 거문고를 받치는 혜강에게는 검은 눈동자를 보여 주곤 했으니, 평범한 사람이나 공자나 완적이나 신이나 모두 헤카톰베를 요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은 똑같으니 말이다. 보편성은 그래서 힘이 있다.     


  그냥 이렇게 단순화시킬 수도 있다. 『일리아스』는 고급 막장 아침드라마를 읽어보는 행위라고. 거기에는 오만가지 인간의 감정들이 들어있다. 막장이래도 고급지면 그게 바로 품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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