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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Nov 28. 2021

제 1권. 역병 & 아킬레우스의 분노

- 호메로스(Homeros)의 『일리아스(ILIAS)』 -

 『일리아스』의 첫 구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여신은 다름 아닌 무사(Musa) 여신을 말한다. 무사 여신은 제우스와 므네모시네의 딸로 예술의 여신, 시가의 여신을 일컫는다. 복수형으로는 무사이(Mousai) 9자매로 불려지고 영어로는 뮤즈(Muse)라고 한다. 예전에 뮤즈라는 간판을 단 음악다방이 꽤 있었더랬다. 서사시는 이처럼 무사 여신을 호출하면서 첫 행을 시작하는데 그것은 여신의 역할 때문이다. 무사 여신이 시가의 여신인 만큼 서사시인은 그녀 혹은 그녀들의 도움을 받아 시적영감을 얻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인간의 입이 아니라 여신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보니 그 권위로 말미암아 이야기의 진실성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참고로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는 이렇게 시작한다.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웅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이어가기 전에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려 한다.

첫째, 트로이아 전쟁은 그리스와 트로이아 간에 일어난 전쟁이라고들 한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들의 시각이다. 당시에는 트로이아도 소아시아에 있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범 그리스권이라 볼 수 있다. 에게 해를 사이에 두고 왼쪽이 그리스 본토이고 오른 쪽이 소아시아(오늘날 터키)인데, 실제 훗날 소아시아는 그리스의 영역이었다. 그렇다고 트로이아를 그리스로 포함시켜 내전이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시에는 그리스가 하나의 전체 개념이 아니라 각각 다른 도시국가 형태로 존재했다는 점이다. 어떤 도시국가와도 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것이 당시 범 그리스 진영이다. 그러다보니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도 각기 다른 나라 출신이었다. 아가멤논은 그리스의 가장 강력한 부족인 아카이오이족 출신이고 아킬레우스는 뮈르미도네스족 출신이다. 이 책에 나오는 아카이오이족, 아르고스인들, 다나오스 백성들 등은 넓은 의미로 그리스인들을 말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트로이아도 트로이아 한 나라가 아니라 트로이아 연합군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둘째, 책을 읽다 보면 신이나 인물, 자연, 사물 등의 앞에 각종 수식어구가 붙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1권에서 나오는 예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훌륭한 정강이받이를 댄 아카이오이족, 멀리 쏘는 아폴론, 속이 빈 함선들, 머릿결 고운 레토, 준족 아킬레우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 볼이 예쁜 크뤼세이스, 청동갑옷을 입은 아카이오이족, 목소리가 멀리 들리는 크로노스의 아들 등이 있다. 그 중 내 마음을 끄는 표현은 흰 팔의 여신 헤라였고 압권은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다. 흰 팔의 여신 헤라는 ‘우유빛깔 헤라여신’이라는 구호가 떠오를 만큼 하얀 피부에 대한 갈망이 지금으로부터 약 2600여 년 이전에도 있었다니 그저 놀랍기만 하다. 화장품 브랜드 ‘헤라’는 그래서 ‘헤라’인가.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은 에오스를 말한다. 새벽이 찾아왔다, 라고 짧게 말하면 될 것을 호메로스는 이른 아침에 태어난 장밋빛 손가락을 가진 새벽의 여신이 나타났다, 라고 했다. 이 얼마나 로맨틱하고 아름다운 표현인가. 그러나 이와 같은 형용사적 수식어구는 그저 신의 특성을 예쁘게 치장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서사시 운율이라고 할 수 있는 6각운(hexameter)을 맞추기 위해서는 간결한 문장으로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그림출처: YES24]

  어느덧 트로이아 전쟁은 10년째로 접어든다. 프롤로그에서 언급했듯이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서 전쟁 10년 중 마지막 10년째를 다룬다. 역시나 마지막 해가 하이라이트다. 어느 전쟁이든 마지막에 누가 이겼고 누가 졌고, 누가 살았고 누가 죽었는지, 그 결말이 중요한 법이니 말이다. 첫 사건은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의 반목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원래 한 편이었지만 제대로 한 판 붙었다.     


  사연은 이렇다. 그리스 진영에 전염병이 돌았다. 백성들이 잇달아 쓰러졌다. 역병을 보낸 장본인은 아폴론. 아폴론이 화가 난 이유는 아가멤논이 아폴론 신전의 사제 크뤼세스를 모욕했기 때문이다. 크뤼세스에게는 볼이 예쁜 크뤼세이스라는 딸이 있었다. 그 딸은 아가멤논에게 전리품으로 분배되었고 사제 크뤼세스는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몸값을 가지고 찾아갔으나 아가멤논이 매몰차게 내쫒아 버렸던 것이다. 이는 예언자 칼카스가 증명했다.     


  칼카스의 말에 아가멤논은 분노했다. 그리고 땡깡을 부린다. 크뤼세이스를 돌려주겠지만 대신 다른 명예의 선물을 마련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에 아킬레우스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항변하자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의 여자, 브리세이스를 빼앗아버리겠다는 것이다. 억지도 이런 억지도 없다. 이는 자기 여자와 헤어지게 되었으니 친구 여자를 빼앗겠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거의 난봉꾼이나 다를 바가 없다.     


포이보스 아폴론께서 나에게서 크뤼세이스를 빼앗아 가시니
나는 그녀를 내 배에 태워 나의 전우들과 함께 보낼 것이오.
그러고는 내 몸소 그대의 막사로 가 그대의 명예의 선물인
볼이 예쁜 브리세이스를 데려갈 것이오. 그러면 내가 그대보다
얼마나 더 위대한지 잘 알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도 앞으로 감히
내게 대등한 언사를 쓰거나 맞설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오.     


  신과 같은 아킬레우스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 비록 아가멤논이 명망 있는 아트레우스 가문 출신으로 그리스 총사령관이라지만, 그도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아들인 것이다. 그리스 북부 지방인 텟살리아에서 뮈르미도네스족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한 수고로움에도 불구하고 명예의 전리품인 자기 여자를 빼앗긴다고 생각하자 그는 아가멤논을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한다. 이 때 헤라가 보낸 아테네가 중재에 나선다. 그 두 여신에게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아 멸망의 핵심 전력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자, 말다툼을 중지하고 칼을 빼지 말도록 하라.
다만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말로 그를 꾸짖도록 하라.
내가 지금 그대에게 하는 말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인즉,
지금 이 모욕으로 말미암아 빼어난 선물들이 세 배나 더 그대에게
돌아가게 되리라. 그러니 자제하고 우리에게 복종하도록 하라.     


  그래도 아킬레우스는 분을 삭히지 못하고 다시 아가멤논에게 대든다. 이 정도는 되어야 아킬레우스다. 이번에는 네스토르가 중재에 나섰다. 네스토르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서남부에 위치한 멧세네 지방 퓔로스의 왕으로서 지혜를 겸비한 노장이었다.     


그대 아무리 위대하기로 그대에게서 여인을 빼앗지 마시오, 처음부터
아카이오이족의 아들들이 명예의 선물로 그에게 준 것이니
그대로 두시오. 그리고 그대 펠레우스의 아들이여! 그대는
힘으로 왕에게 대항하지 마시오. 제우스께서 영광을 주신,
홀을 가진 왕에게는 훨씬 더 큰 명예가 돌아가는 법이오.
그대 아무리 강력하고 그대를 낳아준 어머니가 여신일지라도,
그가 더 많은 사람들을 다스리니 그대보다 그가 더 위대하오.     


  아카이오이족의 아들들은 아가멤논과 그의 동생 메넬라오스를 가리키고 펠레우스의 아들은 아킬레우스를 말한다. 네스토르는 양쪽 모두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이쯤 되면 그 둘의 다툼은 단순히 여자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그 둘은 파워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총사령관 아가멤논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명령에 정면으로 덤벼드는 아킬레우스의 콧대를 납작하게 만들고 싶었을지 모른다. 이에 반해 아킬레우스는 어떤가. 신의 뜻에 의해, 장수하지만 명성 없는 삶과, 단명하지만 명성을 누리는 삶 가운데 후자를 선택한 아킬레우스의 눈에는 아가멤논의 유아 같은 발상이 얼마나 하찮게 여겨졌을까. 그는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한 채, 회의장에도 싸움터에도 나가지 않고 자신의 처소에 틀어박혀 버렸다.     


  아킬레우스는 기도했다. 기도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짧게 살지만 명예롭게 사는 삶을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명예까지 빼앗기는 이런 경우는 있을 수 없다. 그의 기도는 어머니 테티스에게 전해졌고 테티스는 올륌포스 제우스에게 올라간다. 청탁이다. 예전에 테티스는 제우스를 위험에서 구해준 적이 있었다. 이제 제우스가 보답할 차례인 것이다. 테티스는 눈물로 호소한다. 한 때, 헤라, 포세이돈, 아테네가 제우스를 포박하려 했을 때, 여러 불사신들 중 오직 테티스만이 제우스를 수치스러운 파멸에서 구해주었던 점을 기억하고 있는 제우스는 테티스의 간청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한다. 헤라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빨리 떠나라고 재촉하면서.     

  그렇지만 헤라가 어떤 여신이던가. 눈치가 100단 아니던가. 트로이아의 파멸을 강력히 원하는 헤라는 테티스가 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 꼬치꼬치 캐묻는다. 헤라의 추궁에 짜증이 인 제우스는 남성우월주의적인 언어폭력을 내뱉으며 헤라를 겁박한다. 제우스의 워딩은 예의 없고 배운 거 없는 거친 인간 남정네와 무엇이 다르랴!     

그대는 참 이상하구려. 언제나 억측이나 하며 나를 감시하니 말이오.
그래 봐야 별수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내 마음에서 점점 더
멀어질 것이오. 그리고 그것은 그대에게 더욱 쓰라릴 것이오.
만약 그대가 말한 대로 된다면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 즐거움이
될 것이오. 그러니 가만히 앉아 내가 시키는 대로나 하시오.
내가 그대를 향해 이 무적의 팔들을 휘두르는 날에는
올륌푸스의 신들이 다 덤벼들어도 그대를 돕지 못할 것이오.     


  부부싸움에 치이는 건 늘 자식이다. 반면 중재도 자식이다. 이 때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나선다. 그는 제우스와 헤라의 친자식이다. 간절한 말투가 지극히 인간적이어서 듣는 이의 마음이 싸하다. 헤파이스토스는 언젠가 제우스와 헤라가 부부싸움을 할 때, 헤라 편을 들었다가 제우스가 자신을 신티에스족이 사는 렘노스 섬으로 던져버린 아픈 경험을 언급하며 어머니가 자중하기를 간청한다. 신티에스족은 렘노스 섬의 가장 오래된 선주민을 말한다.     


참으십시오. 어머니! 속이 상하시더라도 꾹 참으십시오.
저를 사랑하는 어머니께서 내 면전에 얻어맞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때는 아무리 마음이 괴롭더라도 제가 어머니를 도와드리지
못할 것입니다. 올륌포스의 주인에게는 대항하기 어려우니까요.
그분께서는 전에도 한번 제가 어머니를 구해드리려 했을 때
제 발을 잡고 신성한 하늘의 문턱에서 내던지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온종일 떨어지다가 해질 무렵 렘노스 섬에
닿았을 때는 숨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했습니다.
허나 그곳에 떨어진 저를 신티에스족이 곧 보살펴주었지요.     


  헤파이스토스 덕택에 올륌포스에는 평화가 찾아들고 신주를 마신 신들에게는 그칠 줄 모르는 웃음이 인다. 그리고 찬란한 햇빛이 이울어지고 밤이 되자 제우스 곁에는 헤라가 눕는다. 그래서 부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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