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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Oct 30. 2022

완벽한 소통이 되지 않을 때

- 외젠 이오네스크의 『대머리 여가수』 -

  인간은 습관적으로 폭력적이다. 매일 인간은 타인에게 알게 모르게 폭력을 가하며 살아간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그렇다는 것을 모른다. 그게 인간 사회의 폭력이 쉽게 근절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를 소환할 필요도 없이,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그만큼 위험하다. 주먹을 휘두르거나 욕설을 내뱉거나 하다못해 침이라도 뱉으면 그런 것들이 명백한 폭력행위임을 인지하겠지만, 우리가 하는 일상적인 폭력에는 가해자는 모르고 피해자만 양산하는 폭력들이 너무나 많다. 사람들이 대개 가장 빈번하게 저지르는 폭력은 말 없는 시선폭력과 한 두 마디 던지는 언어폭력이다. 우리는 시선에 상처받고 언어에 고통 받는다. 이 두 가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나의 해방일지>의 염미정이나 구자경 같은 이들도 사람들과의 소통을 그토록 두렵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머리 여가수』는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의 불가능을 역설한다. 그런데 그 방식이 재미있다. 이른바 부조리극이다. 부조리극은 195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시작한 전위예술로서 대표작가로 외젠 이오네스크, 사무엘 베케트, 장 주네, 헤럴드 핀터 등이 있다. 부조리라는 용어는 알베르 카뮈의 <시시포스의 신화>에서 유래한다. 우리가 아는 사전식 개념인 이치나 조리에 맞지 않음, 을 넘어서는 개념이다. 부조리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카뮈의 책으로 들어가보자.     


  이 세계 자체는 합리적이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전부다. 그러나 부조리한 것은 바로 이 비합리와, 명확함에 대한 미칠 것 같은 열망의 맞대면이다. 그 명확함에 대한 호소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서 메아리친다. 부조리는 인간과 세계에 똑같이 관련된다. 지금으로서는 부조리만이 그들을 이어주는 유일한 매듭이다.     


  부조리는 인간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의 대면에서 생겨난다. 잊어서는 안 될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바로 이것에 매달려야 한다. 생의 결론이 송두리째 그것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비합리와 인간의 향수 그리고 그 두 가지의 대면에서 솟아나는 부조리, 이것이 바로 한 실존이 감당할 수 있는 모든 논리와 더불어 필연적으로 끝나게 되어 있는 드라마의 세 등장인물이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부조리는 합리성을 열망하는 인간이 비합리성으로 가득찬 이 세계를 이해하려고 할 때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부조리극에는 인간들이 믿고 싶어하는 마음에 반하여 이해되지 않고 믿겨지지 않는 적나라한 현실이 등장한다. 그리고 그 접점에 부조리한 상황이 발생한다. 결국 인간은 아무리 이 세상을 이해하려고 해도 다 이해할 수 없다. 부조리는 논리로써 따지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감정으로 느끼는 것이다. 그러면 어쩌랴. 그냥 포기하고 부조리에 결박당한 채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원망하며 자살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그래서 카뮈는 제시한다. 시시포스처럼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반항하는 인간이 되라고. 산 정상까지 밀어올린 바위가 설령 다시 떨어지는 형벌을 받더라도 굴하지 않고 그 무의미해 보이는 일을 끝까지 해내라고. 그게 바로 실존적인 인간이다.     


  산다는 것은 곧 부조리를 살려 놓는 것이다. 부조리를 살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부조리를 주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하게 일관성 있는 철학적 태도는 곧 반항이다.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의 어둠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반항은 어떤 불가능한 투명에의 요구다. 반항은 매 순간 세계를 재고할 대상으로 삼는다. 위험이 인간에게 반항해야 할 유일무이한 기회를 제공하듯이, 형이상학적 반항은 경험 전반에 의식을 펼쳐 놓는다.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 반항은 동경이 아니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그 반항은 깔아뭉개려 드는 운명에 대한 확인 그러나 그에 따르기 마련인 체념을 거부하는 확인일 뿐이다.      
[그림출처: YES24]

  『대머리 여가수』는 시작부터 비논리적이다. 영국식 추시계가 영국식 종을 열일곱 번 울리니 스미스 부인은 이렇게 말한다. ‘어, 아홉시네.’ 뭐 그런 식이다. 이해하려고 하면 힘들다. 그러려니 하자. 시계가 고장 났을 수도 있으니.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부부의 대화를 들어보자.     


스미스: 도무지 이해가 안 돼요. 왜 꼭 신문엔 죽은 사람 나이만 나오는지, 새로 태어난 사람 나이는 안 나오고. 말이 안 되죠.
스미스 부인: 듣고 보니 정말 그렇네요.
스미스: (계속 신문을 읽으며) 쯧쯧 바비 와트슨이 죽었어.
스미스 부인: 어머, 어째, 언제 그랬대요?
스미스: 뭘 그렇게 놀라요? 다 알면서. 이 년 전에 죽었잖아요. 장례식 갔던 거 생각 안 나요? 일년 반 전에.
스미스 부인: 생각나죠. 깜빡했다 금방 생각났어요. 그런데 당신이야말로 왜 신문을 보고 그렇게 놀랐죠?
스미스: 여기 난 게 아녜요. 그 사람 부음 기사는 벌써 삼년 전이었죠. 그냥 연상 작용이었어요.     

  

  뭐 이런 식이다. 언어라는 이름의 대화가 너무 비논리적이다. 이렇다면 우리는 동물과 구분된다는 언어를 가진 생물이라는 인간의 위대함은 한낱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무리가 아니다. 인간의 기억력이라는 게 그렇다. 어제 있었던 일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인간이 타인이 죽은 날짜를 어찌 알까. 게다가 우리는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무관심하게 설계되어 있지 않는가.     


  이번에는 마틴 부부가 스미스 부부댁을 방문한다. 마주보고 앉은 마틴 부부의 대화는 정말 웃프다. 부부는 원래 그런 걸까.     


마틴: 저 실례입니다만, 아무래도 전에 어디서 뵌 것 같은데요.
마틴 부인: 글쎄, 저도 전에 어디선가 뵌 것 같네요.
마틴: 혹시 맨체스터에서 우연히 뵙지 않았나요?
마틴 부인: 그럴 수 있죠. 제가 맨체스터 출신이니까. 하지만 거기서 뵀는지 안 뵀는지 말씀 못 드리겠어요. 기억이 안 나요.
마틴: 거 참, 신기하네요. 저도 맨체스터 출신이에요.
마틴 부인: 정말 신기하네요.     


  대화는 계속 이어진다. 둘 다 오 주일쯤에 맨체스터를 떠났고, 둘 다 기차 이등칸을 탔고, 둘 다 팔호차 육호실을 탔고, 둘 다 창가 쪽 삼번에 앉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습관처럼 계속 말한다. 정말 신기하네요. 희한하고요. 하지만 생각이 안 나요. 뭐 그런 식으로. 이 부부 정말 웃기다.     


마틴: 런던에서 브룸필드 가에 사는데요.
마틴 부인: 정말 신기하네요. 희한하고요. 저도 런던에 온 뒤로 브룸필드 가에 살고 있어요.
마틴: 정말 신기하네요. 그, 그럼, 우리가 브룸필드 가에서 만났나 보군요.
마틴 부인: 정말 신기하네요. 희한하고요. 그래요, 분명 가능해요. 하지만 생각이 안 나요.
마틴: 전 십구번지입니다.
마틴 부인: 정말 신기하네요. 저도 십구번지예요.



  그리고 둘은 확인한다. 그 둘은 가수 휘성의 노랫말처럼 ‘같은 집 같은 방에서 같이 자고 깨는’ 부부라는 것을. 두 살배기 금발인 한 눈은 하얗고 한 쪽 눈은 빨간 앨리스라는 딸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두 사람은 오래 떨어져 산 이산가족의 만남처럼 서로 부둥켜안은 채 잠이 든다. 오해는 풀렸다. 부부도 소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장면이 이런 식으로 끝나면 부조리도 조리(?) 있게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생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스미스 댁 하녀 메리에 의해 무참히 부서진다. 마틴의 아이는 오른쪽 눈이 하얗고 왼쪽은 빨간데, 마틴부인 아이의 눈은 그 반대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부부가 서로 이해하고 완벽하게 소통하는 것은 정녕 불가능한 것인가. 상황이 이 정도면 거의 비극이다. 옛날 <웃찾사>라는 개그프로그램 중 <희한하네>라는 코너는 차라리 희극적이라도 한데 말이다.     


  그리고 이런 대화도 있다.     


마틴 부인: 그 사람이 땅바닥에 한 쪽 무릎을 댄 채 허리를 숙이고 있었어요.
마틴, 스미스, 스미스 부인: 저런!
마틴 부인: 네 허리를요.
스미스: 설마.
마틴 부인: 정말이에요. 그래 뭘 하나보려고 가까이 가 봤더니……
스미스: 그랬더니요?
마틴 부인: 풀어진 구두끈을 다시 매고 있더군요.
마틴, 스미스, 스미스 부인: 세상에!
스미스: 딴 사람이 한 얘기면 안 믿었을 거예요.
마틴: 왜요? 다니다 보면 더 이상한 일도 많아요. 오늘만 해도 지하철에서 봤는데 어떤 사람이 조용히 앉아서 신문을 읽더군요.
스미스 부인: 희한한 사람이네.
스미스: 아까 그 사람이겠지.     


  상식적인 일상생활조차도 희한하게 받아들여지는 모습이다. 허리를 숙이고 구두끈을 다시 매는 것, 지하철에서 신문을 읽는 모습같이 흔한 일상도 이상한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간에 이해되지 못하고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타인이 하는 이런 평범한 일상사가 놀랍고 용인되기 어려운 일이 될까. 근데 지하철에서 신문이나 책을 보는 장면은 지금의 상식으로는 희한한 사람은 아니겠지만 드문 모습이긴 하다. 지금 이 대사는 더 이상 웃음을 주지 못할 것 같다. 거의 모두 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요즈음, 부조리극의 위상을 제대로 누리려면 마틴의 대화는 이렇게 수정되어야 한다. ‘오늘만 해도 지하철에서 봤는데 어떤 사람이 조용히 앉아서 카톡을 하더군요.’ 이렇게 웃겨야 제대로 된 부조리극이 된다.     


  책 제목 『대머리 여가수』부터 부조리하다. 극에 대머리 여가수라는 말은 딱 한 번 나온다. 그런데 그것도 전체적인 내용과는 별개로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제목은 『대머리 여가수』인데 주인공은 아니다. 조연도 아니다. 지나가는 행인1 정도다. 제목보고 책을 사신 독자들은 소위 말해 낚였다. 그런데 사실 여자들은 거의 대머리가 없다, 라는 게 상식이다. 그러니 대머리 여가수라는 말 자체가 페이크다. 다시 말해 그녀는 책 주인공으로 등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제목은 이렇게 정하고 내용은 다른 것을 쓰는 외젠 이오네스코에게는 천재의 향기가 난다. 없는 것을 어떻게 쓴단 말인가. 스미스댁을 방문한 소방대장과 스미스 부인의 대화를 들어보자. 이게 전부다.     


소방대장: (문 쪽으로 향하다가 멈춰서) 그런데 대머리 여가수는?
전체적인 침묵, 답답함.
스미스 부인: 늘 같은 머리 스타일이죠.     


  책은 스미스, 스미스 부인, 마틴, 마틴 부인의 차갑고 적의에 찬 ‘아무말 대잔치’로 마무리된다. 네 인물 모두 서로 덤벼들 듯 아무 말이나 외쳐대며 서로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처음엔 그나마 의미 있는 말들이었으나 점차 아, 이, 야, 등의 무의미한 아우성으로 서로의 귀에다 고함을 내지르며 얼굴을 붉히는 것이다. 언어 소통을 시도하면 할수록 점점 더 불통이 되어버린다. 듣는 자는 없다. 오직 내 말이 먼저다.     


  책은 이렇게 끝난다.  

   

갑자기 대사가 중단된다. 다시 조명이 들어오면 마틴 부부가 첫 장면의 스미스 부부처럼 앉아 있다. 연극이 다시 시작된다. 마틴 부부가 최초 스미스 부부의 대사를 그대로 되뇌는 가운데 서서히 막이 내린다.   

  

  누가 말해도 상관없다. 대사가 바뀌어도 우리는 남의 대사를 자기 것 인냥 똑같이 반복한다. 사람들은 다 거기가 거기다. 인류 전체가 불통의 시대에 사는 것이다. 그러할지니 완벽한 소통이 불가능하다고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소통과 불통 사이에 놓인 행간을 읽으면서 그저 작은 소통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면 된다. 그게 소통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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