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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te Fall Dec 11. 2022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지 못해
전전긍긍할 때

-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 -

  요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MBTI 성격유형검사’는 참으로 미래지향적이다. 그것은 MBTI 유형이 우리에게 일종의 ‘가능성’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자신의 유형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제공받는다. 예를 들어 ESFJ 경우에는 ‘호기심 많은 예술가형’이라는 호칭이 주어지고 그에 따른 특징이나 장점이 공책에 정돈된 필기처럼 무수히 나열되는 식이다. 어떤 사람이 그 타입이라면 그 자신은 예쁜 관계를 중시하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그렇다면 스스로 최면을 걸어 살아가면 되고, 현재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더 바람직한 사람, 더 나은 사람으로 승격되는 것은 번데기에서 나비로 탈바꿈하는 그 이상으로 감동적이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삶의 힘이 된다. 우리는 꿈을 먹고 살고 있지 않는가. 카르페 디엠을 아무리 외치며 살아봐도 현실은 생각만큼 녹록하지 않다. 강팍한 현실을 위로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꿈을 꾸는 것이다. 사람들이 버킷 리스트(Bucket list)를 써 보는 이유는 가능성 혹은 꿈을 현실화 해보고자 하는 의지나 희망이다. 양동이(bucket)에 올라가 양동이를 걷어차는 절박함은 아닐지라도 사소하나마 기록된 꿈 목록은 그 자체가 의미가 된다. 설령 목록 중 일부 혹은 많은 부분이 이루어지지 않은 들 무엇이 문제가 될까. 얼마라도 해낸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적어서 손해 볼 일은 별로 없다.     


  <시카고>라는 작품에서 열연한 퀸 라티파(Queen Latifah) 주연의 라스트 홀리데이(Last holiday)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지아 버드(퀸 라티파 분)은 시한부 인생이라는 오진 판정을 받고 평소 자신이 동경하던 체코의 카를로비 바리(Karlovy Vary)로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그 도시는 체코 프라하에서 130km 떨어진 온천도시로서, 14세기 초 카를 4세에 의해 발견되었다. 내게 있어 카를로비 바리는 다양한 온천수를 시음했던 곳으로 기억되는데, 영화 속 주인공은 스키 등의 동계스포츠에 푹 빠져드는 모습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녀는 (잘못 판정된) 죽음을 앞두고 그곳으로 가게 되었는가? 평소 그녀는 가능성(Possibilities)이라는 제목의 스크랩북에 그 도시와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와 자신이 만든 요리 사진 등을 스크랩해둔 것이다. 그녀가 그곳으로 갔을 때, 그리고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가 눈을 헤치고 찾아왔을 때, 그녀의 삶은 ‘Possibilities’에서 ‘Realities’로 바뀌었다. 가능성이 현실이 될 때 우리는 훨씬 자유로워진다.     

[그림출처: 다음]

  밀란 쿤데라 식으로 표현하면 힙업이 어려운 이유는 중력 때문이다. 남자든 여자든 나이를 먹을수록 가슴이 아래로 처지는 것도 동일한 연유에서이다. 우리가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한, 중력을 거슬러 위로 향하는 건 그만큼 요원하다. 그래서 사이먼 앤 가펑클(Simon & Garfunkel)은 엘 콘더 파사(El Conder Pasa)라는 노래에서 땅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소리를 낸다고 했을까(A man gets tied up to the ground / He gives the world its saddest sound). 중력을 거스르는 행위는 가능성을 현실로 만드는 도전이다. 그리고 여기 불가능할 것 같은 가능성을 현실로 바꾼 한 남자의 이야기가 있다.     


  『달과 6펜스(The moon and six pence)』는 서머싯 몸(W. Somerset Maugham)이 1919년에 출간한 작품으로, 익히 알려져 있듯이 후기 인상파 화가 폴 고갱(Paul Gauguin)을 모델로 하고 있는 작품이다. 내게 있어 고갱은 가슴에 뭉클한 돌을 던진 작가이다. 런던에 있는 코톨드 갤러리(The Courtauld Gallery)는 인상파 화가들의 집합소이다. 원래 나는 마네, 모네, 르느와르, 쇠라, 드가 등의 작품을 보러 갔는데, 고갱의 <The Dream>이라는 작품을 보고 그만 반해버린 것이다. 그림을 보고 안구가 튀어나올 것 같은 먹먹함은 그 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강렬한 원색으로 채색된 타히티 여인의 모습을 보고 원시적인 관능을 넘어서는 인간 실존을 느꼈다고나 할까. 

[그림출처: YES24]

  이 책은 <나>라는 나레이터가 고갱을 본 딴 찰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를 풀어쓰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한 줄 요약으로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무탈하게 살던 중년의 런던 증권 브로커가 화가가 되겠다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버린 이야기다. 가장 자본주의적인 주식 매도, 매수 버튼을 누르던 사람이 가장 창의적인 예술가로 변신하려면 아무래도 직장과 가족, 친구 모두를 버려야 할 것 같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책 속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책 제목 『달과 6펜스』는 이 두 가지 상반되는 입장을 대변한다. 즉, 달이 순수한 영혼, 인간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원초적 감성 혹은 절대적인 근원을 의미한다면 6펜스는 자본주의라는 물질적 세계, 상스러운 세속적 가치 또는 이 땅의 욕망에 인간을 묶여두려는 인습을 상징한다. 스트릭랜드는 증권 브로커라는 <6펜스적 세계>에서 화가라는 <달의 세계>로 시공간을 이동한다. 달빛은 정말 사람을 미치게 하는 걸까.     


  사실 우리 대부분은 두 세계를 함께 생활하며 꿈꾼다. 달의 세계에서만 살자니 현실이 녹록하지 않다. 6펜스적 세계에서만 살자니 살아가는 게 너무 허무하고 고단하다. 빵과 버터(bread & butter)라는 생계를 위해 전투적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연하게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직면의 순간을 마주하고 긴 한숨을 짓기도 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둘러 위시 리스트(Wish list)를 작성하거나 독서동아리에 가입하거나 색소폰을 연주해보려 한다. 그래서 달빛의 마성에 취해 모든 걸 버리는 스트릭랜드는 대리만족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전부가 아니면 아예 포기해버리는(All or nothing) 사람. 생각해보면 그는 참으로 소설적이다.     


  생각해보면 내면의 목소리를 찾아 떠나는 스트릭랜드의 삶과 여정은 여러 책의 주인공으로도 만날 수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 『데미안』에서의 싱클레어, 『갈매기의 꿈』에서의 조나단 리빙스턴, 『연어』에서의 은빛연어, 『꽃들에게 희망』을에서의 호랑나비, 『이방인』의 뫼르소…….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도 자신의 마음 속 목소리(inner voice)를 들으라고 연설했고, 유명한 폴란드 축구선수 레반도프스키는 내 안에 무언가가 죽었다고 하며 뮌헨에서 바르셀로나로 팀을 옮겼다. 2012년 잉글랜드 축구팀 아스날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이적한 반 페르시는 ‘내 안의 작은아이’가 속삭여서 그랬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모든 책들과 인간의 단호한 결단은 달빛을 따라 살려는, 그래서 내 식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변주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 결정을 번복하진 않겠다, 라는 짤막한 편지를 남기고 파리로 훌쩍 떠나버린 남편을 설득하기 위해 스트릭랜드 부인 에이미는 <나>를 보낸다. <나>는 그를 설득하기 위해 여러 가지 말로 설득해보지만 그는 요지부동이다. 마치 거미줄처럼 얽힌 인습에 저항이라도 하듯이 완전한 자유인의 모습이다. <나>와 화가의 대화를 들어보자.     


-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부인을 버렸단 말입니까?
-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중략)
- 아니 나이가 사십이 아닙니까?
- 그래서 이제 더 늦출 수가 없다고 생각했던 거요. (중략)
- 이것 보세요. 모두가 선생님처럼 행동한다면 세상이 어찌 되겠습니까?
- 어리섞은 소리를 하는군. 나처럼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을 줄 아오? 세상 사람 대부분은 그냥 평범하게 살면서도 전혀 불만이 없어요.
- 아무래도 이런 격언을 믿지 않으시군요. <그대의 모든 행동이 보편적인 법칙에 맞을 수 있도록 행동하라>는 격언 말입니다.
- 들어본 적도 없거니와 돼먹지 않은 헛소리요.
- 칸트가 한 말인데요.
- 누가 말했든, 헛소리는 헛소리요.     


  칸트의 정언명령조차도 스트릭랜드에게는 헛소리에 불과하다. 그것은 그가 살고 싶어 하는 방식대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다 그렇게 살면 어쩌냐는 걱정은 붙들어 매라고, 자기처럼 사는 사람은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데 거의 맞는 말이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나>는 양심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말하는 그 양심이 맞다. 너 양심이 있니, 없니? 라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했던가. <나>에 따르면 스트릭랜드는 양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를 무조건 싫어할 수는 없다. 양심의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보편적 삶에 대한 개인의 자유의지일수 있기에. 양심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나>의 견해를 들어보자. 무릎을 탁 치게 하는 말이다.


  양심이란 인간공동체가 자기 보존을 위해 진화시켜 온 규칙을 개인 안에서 지키는 마음속의 파수꾼이라고 본다. 양심은 우리가 공동체의 법을 깨뜨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경찰관이다. 그것은 자아의 성채 한가운데 숨어 있는 스파이이다. 남의 칭찬을 바라는 마음이 너무 간절하고, 남의 비난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우리는 스스로 적(敵)을 문 안에 들여놓은 셈이다. 적은 자신의 주인인 사회의 이익을 위해 우리 안에서 잠들지 않고 늘 감시하고 있다가, 우리에게 집단을 이탈하려는 욕망이 조금이라도 생기면 냉큼 달려들어 분쇄해 버리고 만다. 양심은 사회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에 두라고 강요한다. 그것이야말로 개인을 전체 집단에 묶어두는 단단한 사슬이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스스로 제 이익보다 더 중요하다고 받아들인 집단의 이익을 따르게 됨으로써, 주인에게 매인 노예가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그를 높은 자리에 앉히고, 급기야는 왕이 매로 어깨를 때릴 때마다 아양을 떠는 신하처럼 자신의 민감한 양심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양심의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온갖 독설을 퍼붓는다.    

 

  남편의 소식을 들은 에이미는 분노한다. 그리고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한다. 여자에게 넋이 빠져 같이 달아났다면 용서하겠지만, 그림을 그리겠다고 가정을 버린 남자는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했다. 그녀는 알았던 걸까. 그런 남자는 죽어도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왜 절대 용서할 수 없는 걸까. 바람나서 떠난 남자라면 용서라는 이름으로 평생 부채의식을 가진 남자를 끌어안을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아내를 버릴 만큼 꿈을 향해 달아난 남자는 꿈의 크기가 자신의 크기보다 크다고 생각하였을지도 모른다. 한 남자가 추구하는 꿈보다 덜 사랑받는 여자의 삶이란 헛되다고 생각했을지도. 그런데 그녀의 판단은 옳을 수도 있다. 스트릭랜드는 이런 말도 했으니 말이다. 모를 일이다.     


  여자는 말이오. 자기에게 해를 입힌 사람은 용서하지. 하지만 자기를 위해 희생한 사람은 용서하지 못해.  

 

  더크 스트로브라는 남자가 있다. 그는 무엇을 해도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인물이다. 마음도 착하고 돈도 잘 빌려준다. 『인간실격』의 요조가 생각나기도 하지만 요조보단 덜 철학적으로 여겨진다. 스트릭랜드는 그런 스트로브를 아무렇지 않게 이용한다. 무슨 악의가 있어서는 아니다. 스트로브가 그런 것을 좋아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도 화가인데 스트릭랜드의 작품을 걸작처럼 흠모한다. 그러고 보면 그가 최초로 스트릭랜드의 작품을 알아본 사람이 아니었을까. 스트릭랜드가 병으로 다 죽게 되었을 때 온갖 욕을 들어가면서도 자기 집까지 데려와 지극 정성으로 간호한다. 스트로브의 아내 블란치가 그렇게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반대는 사랑에 빠질지 모르는 데 대한 두려움이었다. 결국 그녀는 스트릭랜드와 사랑에 빠지고 버림받아 자살하고 만다. 양심을 따르지 않는 스트릭랜드는 그녀의 죽음에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자신한테 버림을 받아서 자살한 게 아니라 어리 섞고 균형 잡히지 않는 인간이라서 그렇다고. 이와 유사하게 작품 곳곳에는 여성에 대한 비하가 들어 있다. 여성 혐오에 대한 작가의 서술은 오늘날에는 더 큰 논란거리다. 이러한 측면이 작품의 전체적인 주제 의식을 갉아먹을 수 있을 것 같아 안타깝다. 인간의 모든 인습에 저항하는 스트릭랜드의 삶을 그려나가기 위해 선택한 작가의 의도였을까, 아니면 원래 작가가 여성에 대한 혐오증이 있었던 걸까. 스트릭랜드는 남녀간의 사랑조차도 병이라고 한다. 그가 현대의 많은 독자들에게서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공감능력이 부족한 반사회적 또라이라고 낙인 찍히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난 사랑 같은 건 원치 않아. 그럴 시간이 없소. 그건 약점이지. 나도 남자니까 때론 여자가 필요해요. 하지만 욕구가 해소되면 곧 딴 일이 많아. 난 그 욕망을 이겨내지는 못하지만 그걸 좋아하진 않아요. 그게 내 정신을 구속하니까 말야. 나는 언젠가 모든 욕망에서 벗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내 일에 온 마음을 쏟을 수 있는 때가 있었으면 하오. 여자들이란 사랑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으니까 사랑을 터무니없이 중요하게 생각한단 말야. 그래서 우리더러 그게 인생의 전부인 양 믿게 하고 싶어해요. 하지만 그건 하찮은 부분이야. 나도 관능은 알지. 그건 정상적이고 건강해요. 하지만 사랑은 병이야. 내게 여자들이란 쾌락을 충족시키는 수단에 지나지 않아. 나는 여자들이 인생의 내조자니, 동반자니, 반려자니 하는 식으로 우기는 것을 보면 참을 수가 없소.     

 

 고갱처럼, 스트릭랜드도 타히티로 떠난다. 그곳에서 아타라는 여자를 만나 아이를 낳고 그림을 그리며 살아간다. 나병에 걸려 죽을 때까지 그의 예술혼은 사그러지지 않는다. 그의 삶은 항상 안락함 보다는 고통이나 불편함을 감수하는 데 있다. 그것은 안락함이 주는 세상의 구속이 싫어서이기 때문이다. 조금 불편하면 더 큰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인 것이다. 타히티라는 원시적인 섬에서 사는 것이나 나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이나 그의 한결같은 삶은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사회가 정한 보편적인 룰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더 근본적인 원칙에 달려 있다. 죽기 전에 그는 자신이 기거하는 사방의 벽에 걸작을 남긴다. 아름답고도 음란한, 원시적이고 인간세계의 것이 아닌 작품 말이다. 그리고 유언대로 아타에 의해 불태워진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후, 우쭈쭈, 자부심과 에이 씨발, 경멸감으로 파괴해 버린 것이다. 그 정도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어떻게 사는지는 (혹은 죽는지는) 우리의 보편적인 고민이다. 그래봤자 별 볼일 없는 하루가 또 지나가고 만다. 별 볼일 없는 하루들이 쌓이면 큰 바람 없이 그냥 그냥 살아가게 된다. 이생망이라는 말이 그래서 생겼던가. 그렇다고 아무나 스트릭랜드가 될 수는 없다. 그건 대개 불가능의 영역이다. 나는 배분의 문제를 말하고 싶다. <6펜스의 세계>와 <달의 세계>를 자신의 행복점에 맞게 적절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5:5나 3:7이나 무엇이든 상관없다. 앞가르마의 비율이 겨우 우리 얼굴 모습을 조금 다르게 보여주는 것처럼, 삶의 방식 배분의 정도가 우리들을 크게 달라지게 하지 않는다. 한쪽 발을 지상에 디디고 있는 한, 완벽한 황금비율은 불가능하다. 그저 공중으로 내뻗는 다른 발이 그대로 있지 못하고 그냥 땅으로 추락해, 두 발로 지구를 밟지만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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