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리왕 Jul 12. 2022

나쁜 농담의 대가는 침묵

아네트(2021) directed by 레오스 카락스

『아네트』는 철저히 영화다. 영화는 실제 존재하는 세계와 무형의 상상 그사이에 자리 잡은 층위다. 이러한 위치 덕에 영화는 객관적인 기록인 양 세계를 구현하다가도 난데없이 하늘에서 개구리를 떨어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발생하는 걸 두고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영화는 허구와 거짓이 허용되는 ‘물질세계’이기 때문이다. 『아네트』는 뮤지컬 장르를 활용해 이런 영화 특유의 미묘한 유연성을 탁월하게 파고든다. 현실 세계에서는 누구도 노래하며 말하지 않는다. 꼭두각시 인형을 아기로 보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아네트』는 이런 허구를 인정하는 것으로 오히려 현실과 긴밀히 연결된다.    

 

 타이틀도 올라가기 전, 어떤 목소리가 등장해 사람들에게 주의를 준다. 그 목소리는 웃지도, 울지도, 심지어 숨도 쉬지 말 것을 요구한다. 이에 관객들은 크게 숨을 참는다. 목소리가 끝나면 파리 소리 같은 앵앵거림이 짧게 들린다. 이는 감독이 관객에게 잠시 ‘죽어줄 것’을 요구하는 바이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실제로 죽지 않고도 죽음을 통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을 관객에게 제공하겠다고 다짐한다. 그 경험이란 바로 다른 세계로의 이동, 그리고 심연의 목격이다. 이 같은 감독의 역할은 영화 안에서 또 한 번 직접적으로 등장한다. ‘안(마리옹 꼬티아르 분)’은 리무진을 타고 이동한다. 그의 운전기사는 ‘오스카’라는 이름의 은발 남성이다. 감독인 레오스 카락스를 닮은 뒷모습과 그에게 있어 상징적인 ‘오스카’라는 이름, 그리고 전작 ‘홀리 모터스’를 연상케 하는 리무진은 쉽게 조합할 수 있는 단서들이다. ‘안’의 리무진은 감독의 세계다. 리무진 모니터 속 뉴스는 캘리포니아 전 지역에 발생한 산불을 보도한다. 그러나 차창 밖의 캘리포니아는 뉴스와 달리 평화로운 풍경이다. 이러한 대비는 현실과 영화가 구분된 층위의 세계이며 동시에 죽음으로부터 안전한 세계임을 드러낸다. 영화 속 세계는 숙달된 기사가 모는 리무진처럼 외부의 위험과 독립된 채 메시지를 전달한다. 외부의 죽임으로부터 리무진이 옮기는 게 바로 ‘안’의 죽음이라는 사실은 『아네트』의 아이러니한 부분이기도 하다.     


 영화는 많은 항을 대비하거나 중첩한다. 주목할 점은 유독 ‘헨리(아담 드라이버 분)’에게만 대립 항이 많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헨리’에게는 녹색이, ‘안’에겐 빨강이 그들의 퍼스널 컬러다. 빨강과 녹색은 대표적인 보색 관계다. 이 둘은 쌍을 이루지만 동시에 서로 양극단에 위치해 있다. 이 두 사람의 직업도 대비를 이룬다. 스탠딩 코미디언인 ‘헨리’는 사람들을 웃기는 사람, 오페라 가수 ‘안’은 사람들을 울리는 사람이다. ‘헨리’는 무대로 관객을 ‘죽인다’고 표현하는 반면, ‘안’은 무대에서 항상 죽는 역할을 한다. 심지어 ‘헨리 맥헨리’라는 이름조차 ‘맥(Mc)’을 사이에 두고 두 헨리가 대립하는 모양이다. 그는 세상은 물론 자기 자신과도 대립하는 안타고니스트이다. 기묘하게도 ‘헨리 맥헨리’라는 이름을 해석하면 ‘헨리의 아들인 헨리’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헨리’를 중심으로 닫힌 채 순환하는 이름이다. 따라서 ‘헨리 맥헨리’라는 이름은 그가 세상과 단절한 존재이며 악순환에 빠진 인물이라는 암시처럼 다가온다. 그의 단절과 악순환은 ‘안’과의 대비가 점점 벌어지며 심화한다. ‘안’은 오페라 가수로서 성공 가도를 달린다. 그러나 ‘헨리’의 코미디는 야유받고 심지어 뉴스에는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이런 상황 속에 ‘헨리’는 심연에 눈을 뜬다. 그는 ‘아내가 남들을 위해 대신 죽어주는 동안, 나는 집에서 아기나 본다(Babysitting)’라는 독백과 함께 아기를 깔고 앉는(Baby - Sitting) 상상을 한다. 이 농담에 웃는 사람은 그의 상상 속 흑백의 관객뿐이다. 그의 심연에는 끔찍한 농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그는 아내를 죽였다고 농담하고, 결국 그는 이 농담을 심연에서 실현한다.     


 이렇듯 영화의 많은 것들이 ‘헨리’와 척지고 그의 농담에 반대한다. 반면 ‘안’은 영화 전반에 중첩의 그림자를 드리운다. 가장 직접적인 항은 단연 ‘아네트’이다. ‘작은 안’이라는 뜻의 ‘아네트’는 ‘안’이 죽는 순간 같은 노란 옷을 입고 있었으며 이후 생전 ‘안’이 그랬듯 노래를 통해 사랑받는다. 또 다른 중첩은 전 연인인 지휘자를 통해 드러난다. ‘헨리’가 지휘자를 살해하는 장면은 ‘안’이 죽기 직전의 상황과 겹쳐 보인다. 두 사람은 같은 대사를 하고 ‘헨리’와 몸을 부딪친다. 지휘자의 죽음은 앞서 풍랑 위에서 왈츠를 추는 것으로 묘사됐던 상황이 실제로 어떤 상황이었는지, 지휘자를 통해 재현하며 사실을 밝히는 장면이다. ‘헨리’는 ‘죽임 당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코미디를 한다고 말하지만, 영화에서 진실은 죽음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결국 모든 진실이 밝혀지고 ‘헨리 구속된다. 법정에서 ‘진실만을 말할 것이냐 물음에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며 진술을 거부한다. 이제 그의 모든 발언은 죽임의 위험을 수반한다.  이상을 농담할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구치소에서 ‘아네트 면회하는 ‘헨리 장발이었던 머리를 짧게 자르고 빨간색 죄수복을 입고 있다.  모습은 ‘ 닮아 보이는 동시에 대조적이다.  이상 노래할  없는 ‘처럼 그도  이상 농담을   없다. 그러나 ‘ 죽음을 통해 자유를 얻고 ‘아네트 통해 노래를 이어가지만, ‘헨리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에 누구도 그를 대신해줄  없다. ‘아네트 ‘헨리에게 ‘아빠는 이제  이상 누구도 사랑할  없다 말한다. 그의 머리에는 ‘QUIET’이라는 붉은 글자가 쓰여있다. 결국 나쁜 농담의 말로, 심연을 들여다본 대가는 침묵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로커'를 보다 발견한 단촐한 것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