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어(1997) directed by 구로사와 기요시
*스포일러, 결말 포함
태양이 눈 부셔 사람을 죽인 사내가 있다. 그는 평소에도 '아무 의미 없다',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던 사내다. 결국 법정은 이 살인의 원인을 밝히는 대신 그를 냉혈한으로 몰아 사형을 선고한다.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내용이다. 놀랍게도 나는 이와 비슷한 사내를 최근 극장에서 만났다. '큐어'에 등장하는 '오이다'라는 이름의 경찰이다. 당직을 마친 아침 그는 동료 경찰에게 서류를 찾아주고,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뒤, 그의 뒤통수에 총을 쏜다. 그리고는 칼로 총에 맞은 동료의 좌우 경동맥을 'X'자로 베어 버린다. 무엇이 이 수더분한 경찰의 손에 총칼을 쥐게 했을까? 이 잔혹한 범행의 의미는?
영화를 이야기할 때 '장르'는 단순히 분류 체계의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다. 장르는 영화와 관객 사이 맺어진 약속이다. 또는 관객이 영화 관람 경험에 기반해 새로운 이야기를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일종의 '고정관념'이다. '큐어'는 장르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장르를 저버린다. 영화 속 첫 번째 살인은 매춘부를 대상으로 중년 남성에 의해 벌어진다. 영국의 '잭 더 리퍼', 그리고 이를 위시한 여러 범죄 영화들이 떠오르는 상투적인 출발이다. 그러나 영화 시작 5분도 안 되어 범인은 예상도 못 한 곳에서 붙잡힌다. 그를 발견한 '타카베 형사(야쿠쇼 쇼지 분)'만큼이나 관객도 어안이 벙벙하다. 우리는 이제껏 보아온 어떤 범죄영화에서도 알몸으로 벌벌 떠는 살인 용의자를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타카베'가 범인을 찾기 위해 열었던 문은 곧 영화가 장르 밖으로 향하는 탈출구였던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범행을 보여주는 방식에서도 '큐어'는 남다르다. 난자된 시신과 핏자국은 마치 하늘에 구름이 지나가는 모습처럼 화면에 전시된다. 어떤 비명이나 울부짖음도 없다. 긴장을 고조하거나 관객을 겁주기 위한 기술적인 장치도 없다. 오히려 이 모든 걸 '늘 있는 일'이라는 듯한 관조적 태도로 일관하기에 관객은 두려움을 느낀다. 비명이 비운 자리는 공간음이 대신한다. 파도, 세탁기, 벽 너머 누군가의 고함 같은 일상의 소리가 은근하고도 과장되게 음향을 채운다. 끔찍하고도 알 수 없는 이 모든 일은 바로 우리의 하루 안에 일어났음을 강조한다.
'큐어'에 등장하는 살인은 소설 '이방인'에 등장하는 '뫼르소'가 저지른 범행과 닮아있다. 양 세계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공통으로 아무 의미가 없다. '큐어'와 '이방인'은 당연함이 파괴된 세계다. 당연하다는 것은 인과관계가 확실하거나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상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태양이 눈 부셔 사람을 죽인 사건에는 인과관계도 없고 보편적인 상식도 없다. 마찬가지로 '큐어' 역시 이 세계가 치밀한 인과와 충분한 의미로 이뤄졌으리라는 기대를 난도질한다. 결국 최면술사 '마미야(하기와라 마사토 분)'는 무의미한 세계를 견딜 수 없어 텅 비어버린 인물이다. 영화는 그의 내면을 대변하듯 텅 빈 의자 따위의 오브제를 화면 곳곳에 배치한다. 이 공백의 사내는 사람들에게 '넌 누구야?', '여기가 어디야?' 같은 공허한 질문을 반복한다. 사람들은 처음엔 쉽게 답하다가도 이내 말문이 막혀 '마미야'에 윽박을 지른다. 질문을 이해할 수 없어 인물들은 질문자를 공격한다. 이렇듯 '큐어'의 의문사는 '누구'가 아닌 '왜'가 되고, 그 뒤에 붙는 기호는 물음표가 아닌 'X'다. 'X'는 '의미 없음' 또는 '알 수 없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그 자체로 의미가 없거나 알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당연함이 없는 세상에 가득한 건 오직 여지다. ‘~일지 모른다’는 억측에 가까운 가능성만 즐비한다. 이를테면, 정신병을 앓는 아내를 극진히 돌보는 '타카베'는 자살한 아내를 발견하고 절규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은 그가 발견한 게 환상임을 밝힌다. 아내는 주저앉은 '타카베'에게 괜찮냐고 묻는다. 이때 우리는 정말 정신병을 앓는 게 아내인지 '타카베'인지 확신할 수 없어진다. 다른 예로는 '타카베’가 두 번 탑승하는 버스가 있다. 한 번은 아내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러 가는 길, 다른 한 번은 어느 폐건물에 '마미야'를 대면하러 가는 길이다. 버스의 차창은 하늘로 꽉 차 있어 마치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줄곧 보여주던 일상의 공간이나 야외와 달리 이 장면은 스튜디오 조명 아래서 찍은 듯한 조악한 티가 난다. 이전의 장면을 곱씹어 보면 '타카베'는 자가용을 몰기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이동할 이유가 없다. 게다가 버스를 함께 탔던 아내, 그리고 버스를 타고 만나러 간 '마미야'는 모두 '타카베'에게 죽임 당한다. 그렇다면 이 이상한 버스, 그리고 버스를 타고 도착한 장소는 모두 일종의 관념적 공간으로 보아야 할까? 영화는 이처럼 이야기 도처에 빈칸을 뚫어놓고 교활하게도 정답을 상정하지 않는다. 관객은 빈칸에 무엇을 적을까 고민하며 영화를 감상하지만, 돌아오는 건 'X'로 일관하는 채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