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리왕 Mar 26. 2024

영화는 수많은 이름들의 지층

<일 부코>(2021) directed by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첫째로, ‘일 부코(Il Buco)’는 이탈리아어로 구멍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막막할 정도로 많은 것을 지칭할 수 있다. 문맥에 따라 구멍은 물질과 개념, 시간과 공간, 신체와 정신 모두에 쓰인다. 또 종류에 따라 구멍은 채워야 할 과제일 수도, 어딘가로 향하는 통로일 수도 있다. 알다시피 우리는 땅굴에 사는 뱀의 말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인간들의 후손이다. 그 유전적 여파로 구멍 안을 들여다보는 건 우리의 오랜 충동이다. 도마는 예수 그리스도 손발의 못 구멍을 봐야겠노라고 큰소리쳤고, 앨리스는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갔고, 유수의 석학들이 여전히 블랙홀을 연구한다. 나의 이런 장광설로 읽는 이의 마음에 구멍에 대한 흥미가 다시 피어올랐다면, 이제 영화를 볼 차례다. 미켈란젤로 프라마르티노 감독의 영화 <일 부코>는 구멍을 돌파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 문장에 쓰인 ‘구멍’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로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남부 이탈리아에 실존하는 어느 동굴일 수도, 병로한 신체일 수도, 카메라와 영사기의 렌즈일 수도 있다.


 둘째로, <일 부코>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감독의 연출 아래 배우들이 재현하지만, 극영화는 아니다. 영화 대부분의 장면이 동굴을 탐험하는 과정이지만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처럼 자연의 경이를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이 작품의 장르를 굳이 밝혀야 한다면 나는 <일 부코>를 산문시이자 논픽션이라고 말하고 싶다. 객관적 사실을 주관에 따라 배치하고 충돌시키며 리듬을 만들고 의미를 부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영화는 검은 화면이 서서히 밝아지는 긴 쇼트로 포문을 연다. 마치 우리의 동공이 암순응하듯 영화는 눈을 뜨며 관객과 카메라를 동기화시킨다. 이때 우리의 시점은 구멍 안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하늘과 땅, 그리고 피조물들의 형체를 서서히 받아들인다. 이렇게 렌즈와 조리개에 따라 서서히 현현하는 세계는 우리 뇌리 깊은 곳 창조의 기억, 출생의 경험을 불러일으킨다. 이 한 장면에 함축된 세계만으로도 이 영화를 시(詩)라고 부르기엔 전혀 무리가 없다.


 동굴과 그 주위 벌판을 담던 카메라는 도시로 돌아와 흑백 텔레비전에 주목한다. 브라운관에는 밀라노의 피렐리 빌딩 외벽을 리프트로 오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방영 중이다. 각 층의 그 내부를 보고 질문하던 방송 진행자는 “내가 느끼는 걸 시청자들도 느끼도록 돕는 게 나의 일”이라고 첨언한다. 1960년대의 이탈리아는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며 고층빌딩을 세우던 시기다. 같은 시기에 북부의 젊은 탐험가들은 남부의 동굴을 조사하러 떠난다. 60년대 이탈리아의 경제 성장과 1961년 비푸르토 심연 탐험은 객관적 사실이며 독립 시행이다. 그러나 감독은 의지적으로 이 두 정보를 충돌시켜 동굴 탐험이 가진 의미를 확장한다. 모두가 위를 향할 때 아래로 향하는 사람들. 동굴 탐험대는 TV쇼 진행자 말마따나 동굴 속 지층에 대해 질문하고, 감독은 그 느낌을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탐험가들은 동굴 속으로 돌과 불을 던지며 그 깊이를 가늠한다. 돌이 땅에 부딪혀 소리가 돌아오기까지, 불빛이 어둠 속으로 사그라들 때까지 우리는 얌전히 기다려야 한다. 10초 남짓한 이 기다림의 시간은 미지의 자연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겸양이며 동시에 영화라는 매체 특유의 리듬이다. 이때, 이 돌과 불을 던지는 행위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 유명한 몽타주와 대조하는 것은 무리일까. 돌, 불, 뼈 모두 인류 문명의 발달을 상징하는 기표라는 점에서 이 과감한 대조는 유효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2001…>에서 인류는 이를 하늘로 던지며 인간의 야망을 발산하지만, <일 부코>의 태도는 종교적이다. 원래 성소에 들어가려면 어떤 흠도 없어야만 한다. 인간들은 이 ‘험한 것’들을 동굴에 제물로 바친다. 이제 돌과 불을 버린 탐험대에게 폭력이나 야욕의 여지는 남아 있지 않다.


 준비를 마친 탐험가들은 밧줄과 사다리에 의지해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동굴 내부를 비추는 건 탐험가들의 작은 랜턴뿐이다. 이제 극장은 동굴의 연장선상이다. 작은 불빛에 의지한 채 깊이 걸어 들어가는 탐험가들의 모습에 관객은 온 감각을 집중한다. <일 부코>가 선사하는 체험은 <그래비티(2013)>를 위시한 그것과는 또 다르다. 유수의 할리우드 영화들은 관객이 영화의 존재를 잊고 무아지경에 빠지도록 인공의 체험을 설계한다. 만약 통상적인 작법으로 이 영화를 만들었다면 관객은 극장을 나서며 스스로 동굴 안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을 느꼈노라 증언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일 부코>는 우리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주기보다는 영화가 우리 쪽으로 점점 다가오는 듯한 심상을 준다. 이런 느낌이 어떻게 가능한지, 사전에 설계할 수 있는 건지 일개 관객으로선 알 수 없다. 그저 ‘시네마’라는 말로 그 가능성을 함축할 뿐이다.


 젊은이들의 동굴 탐험이 이뤄지는 동안 마을 한 편에선 노인의 병세가 깊어진다. 비푸르토 동굴이나 기타 시대적 배경과 달리 이 노인에 대하여 관객은 어떤 것도 알 수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가 이 영화 속 동굴과 같은 지역, 같은 시대의 사람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이 노인의 존재 덕분에 영화는 스스로 납작해지는 것을 방지한다. 만약 그의 등장 없이 영화가 동굴 탐험에만 주목했다면 관객 다수는 이 영화를 ‘자연의 신비’나 ‘위대한 도전’ 같은 상투적인 말로 요약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름 모를 노인의 일상은 비록 그의 언어를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통상적이고 또 범속하다. 이는 영화가 ‘구멍’ 앞에 낮은 자세를 취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게다가 동굴 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노쇠해 누워있는 노인의 몸과 만나 그의 신체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준다. 자연과 개인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환원한다. 마치 <마지막 잎새>처럼 탐험대가 동굴 끝에 다다르면 노인의 수명도 다할 것만 같은 긴장도 유발한다. 영화가 이런 야릇하고 어지러운 감상을 위해 수행한 것은 그저 장면과 장면을 배치하고 부딪힌 것뿐이다. 이렇게 <일 부코>는 앞서 언급한 <2001…>이나 <그래비티>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관객에게 우주를 보여준다.


 끝으로, <일 부코>의 올라가는 엔드 크레딧을 보며 나는 전에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을 한다. 수직으로 쌓인 제작진들의 이름이 꼭 지층 같다고. 그 이름들이 위로 오르는 게 아니라 내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만 같다고. 이제껏 셀 수 없이 영화를 봤지만 엔드 크레딧에 특별한 감흥을 느낀 경험은 떠올리기 어렵다. 예술의 역할 중 하나는 세상을 이전과 다른 시각으로 보도록 만드는 것이다. <일 부코>는 마치 아기들의 초점책처럼 미숙한 우리의 시각을 개발한다. 극장을 나선 관객의 눈에 온 세상이 탐험해야 할 동굴처럼 보이기만 한다면 영화의 소임은 그것으로 끝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누가 범인(犯人)인가. 누가 범인(凡人)인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