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설 연휴를 이틀 앞두고, 한남동에서 서윤 언니를 만났다. 홍콩과 가까운 중국 선전에서 중국어, 한국어 번역 업무를 하는 언니는, 비즈니스 출장차 서울에 왔다. 10월 말에 언니가 뉴욕을 떠났으니 3개월 만의 재회이다. 6호선 한강진역 3번 출구에서 언니를 기다리며 마음이 들떴다.
저 멀리서 웃으며 걸어오는 언니가 반가웠다. "얘,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다." 언니가 내 손을 잡으며 한국말로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언니 말이 맞다. 파마한 다음날 미국으로 갔으니, 뉴욕에 있을 때 내 파마머리는 너무도 탱글했다. 원래 파마는 하고 나서 몇 개월 지나야 가장 예쁘지 않은가. 뉴욕에서 찍은 사진을 다시 보면 여전히 파마머리가 웃기다. 3개월이 지난 시간만큼 머리도 내 얼굴에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뉴욕에서 언니와 줄곧 영어로 대화했었기에, 언니의 한국어는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말투와 목소리의 높낮이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언니의 영어는 다소 하이톤의 귀여운 느낌이었다면, 한국어는 보다 차분하고 성숙한 느낌이었다.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뉴욕에서 언니는 주로 밝은 색감의 스웻셔츠에 머리띠를 하고 백팩을 메고 있었는데, 요 며칠 영하의 추위였다가 확 풀려버린 오늘 날씨처럼, 레이스에 트위드 재킷을 입은 언니의 모습은 봄 같이 화사하고 여성스러웠다.
우리는 한남동의 유명한 매운 냉면을 먹은 후 카페에 가서 본격 수다모드에 들어갔다. 나는 언니에게 언니가 돌아가고 나서 찍었던 뉴욕에서의 사진들을 보여주고, 몇 주 전에는 어학원의 또 다른 친구인 일본인 미키와 북촌에서 만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뉴욕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여러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우리는 큰언니 짜이쉬안에게 보여줄 사진도 틈틈이 찍었다. 우리가 만난다고 하니 짜이쉬안 언니는 몹시 부러워했다. 최근 발생한 대만 지진을 직접 겪으며 불안해하던 언니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싶어, 우리는 밝게 웃으며 사진을 남겼다. 서윤 언니에게 짜이쉬안 언니가 사는 가오슝에 언제 한번 놀러 가자고 하니, 중국 본토 사람과 대만 사람은 정치적 상황 때문에 왕래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어학원에서 함께 공부했던 러시아 친구가 떠올랐다. 그녀는 자유로운 삶을 찾아 러시아를 떠나 스페인에서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정치적 이념과 갈등으로 인해, 온전히 누려야 할 삶에 제약을 받는 사람들의 현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나의 삶에는 얼마만큼의 자유가 있는지 생각해 본다. 자유로운 선택이었다고 착각했던 나의 선택에는 늘 '제한된 시간'이라는 스스로 만든 꼬리표가 따라붙었던 것 같다. 삶에 정해진 지표가 어딨냐면서 비난하면서도, 나 역시 충실히 따르고 있는 나약한 인간이었음을 시인한다. 그래서, 스스로 떳떳한 인간이고 싶어서 나를 옥죄던 시선의 문을 닫고 20년을 기다린 뉴욕으로 가는 여정의 문을 열었다.
서윤 언니는 다시 뉴욕으로 가서 비즈니스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니키는 뉴욕에서 직장을 구해 정착해 보고 싶다고 했다. 미키는 아예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다시 뉴욕에 가고 싶은 걸까? 솔직히 지금은 모르겠다. 과거에는 그리는 미래가 분명했지만, 이제는 그 과거의 나 자신이 아득하게 느껴지고,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10년 차 직장인이었던 나 자신은 땅속 깊이 묻혀버린 것 같이, 한때 존재했다는 기억만이 남았다.
뉴욕에 온 지 이틀째 되던 밤부터, 차가운 공기와 은은한 대마초 냄새가 스며들던 허름한 기숙사 방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피곤한 나머지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며 글을 썼고, 어떤 날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문장이 흐트러지든 말든 신나게 글을 써 내려갔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한동안 외면하기도 했다. 돌아보니 그 모든 순간이 모여 내 여행이 더욱 생생하게, 나만의 색깔로 완성된 것 같다. 지난날 나의 용기에, 나의 씩씩함에, 그리고 이 여정에 마음을 함께해 준 모든 소중한 이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