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채호티브 Dec 03. 2018

#8 그들 같은 삶

그동안 감사했어요

조용했던 게스트 하우스에 영국인 할아버지 할머니 부부가 새로 오셨다. 두 분의 성함은 Hugh & Hoonie. 할머니는 첫 만남부터 계단 위에서 이상한 목소리로 “Hello~”라고 말하며 나를 놀라게 하려다 계단 위로 올라온 나를 보고 되려 놀라시고, 편하게 호야라고 부르시면 된다고 말씀드리니 “휴와 후니, 호야 우리는 트리플 H!”라고 좋아하며 웃는, 에너지 넘치는 분이셨고, 할아버지는 말끔한 셔츠를 차려입은, 영국 신사 느낌을 가득 담고 계신 분이었다.



두 분은 은퇴 이후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는 중이었다. 물론 한국에도 방문하신 적이 있었는데, 경복궁과 한복, 김치 만들기 체험, 붓과 한지를 파는 상점이 너무 환상적이었다며 자랑하셨다. 그렇게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오키나와로 오키나와에서 교토까지. 두 분은 여행과 함께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계셨다.



두 분이 여행 일정을 짜는 방식은 독특했다. 교토에 대한 두꺼운 가이드북과 큰 지도 등을 들고 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책을 읽고 지도를 보며 가보고 싶은 곳을 정하셨다. 떠나기 전부터 이런저런 정보를 찾아 철저하게 스케줄을 짜고 그것을 토대로 움직이는 것이 ‘실패하지 않는 여행의 길’이라고 생각했던 나에게는 행여나 교토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가실까 그 모습이 염려스러웠지만, 내 걱정과는 달리 두 분은 교토에 대해, 내일 갈 곳에 대해, 앞으로 갈 곳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내 세상 그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



본격적인 두 분의 교토 여행 첫날, 할머니는 평소에 좋지 않던 무릎이 말썽을 부려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다녀오셨다. 전 날 세웠던 계획이 물거품이 되어버렸지만 할아버지는 그 사실에 전혀 개의치 않으셨고, 대신에 자전거를 빌려 마트에 가 할머니를 위해 만들 맛있는 식재료를 사 와서 요리를 하셨다.


사실 할머니가 아프시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대신 요리를 하신 것은 아니었다. 여행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모든 요리는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무뚝뚝함이 짙게 밴 차가운 인상이라고 느꼈던 할아버지는 굉장히 자상한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설거지를 하셨고, 할머니는 그저 식탁에 앉아 요리의 맛을 평가하거나, 내일은 여기를 가보고 싶다고 말씀하시는 게 전부였다. 


대신, 할머니는 리액션이 정말 좋으셨다. 할아버지가 만든 음식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고마워 여보.”라는 말을 빼놓지 않으셨다. 그렇게 두 분을 바라보고 있다 보면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기 일쑤였다.



두 분은 혼자 여행하는 나를 손자처럼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집에 돌아오면 항상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 물어보셨고, 나는 신나서 사진을 보여주며 두 분께 자랑했다. 그럴 때마다 두 분은 정말 멋지다, 행복했겠다, 대단하다고 말씀하시며 나를 칭찬해주셨다. 그리고 여행 가이드북 포토그래퍼 출신이신 할아버지는 나의 사진에 대해 여러 가지 조언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어느 날, 할머니는 내게 “너는 네가 하는 일을 참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시냐고 물으니 네 모습과 행동을 보고 있으면 너는 참 여행이라는 것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다. 여행을 다니며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누군가가 진심으로 나에게 직접 말하며 인정해준 것은 처음이었다. 그 말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지내는 일주일은 행복하게 흘러갔다. 그 기간 동안 나는 그분들에게 많이 의지했던 것 같다. 아마도 나는 혼자 여행을 하며 적잖게 외로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나를 진심으로 이해해주고 보듬어주는 분들이라고 느꼈고, 나는 그들에게서 이제는 볼 수 없는, 나의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할머니는 아침마다 계란을 구워 먹는 나에게 ‘Eggy Boy’라는 재미있는 별명을 지어주셨다. 할머니는 매사에 웃음을 잃지 않으셨고, 상대방을 저절로 기분 좋게 만드는 매력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다리를 걱정하며 쾌유를 빈다는 나의 말에 눈시울을 붉히기도 하는 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호스트 분께서 마련하신 홈 파티도 같이 즐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일정이 변경되어 카나자와라는 지역으로 가기 위해 하루를 일찍 체크아웃하셨다. 늦잠을 자버린 내 방문 앞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작은 선물이 놓여 있었다. 화들짝 놀란 나는 부랴부랴 밖으로 나가 보답으로 며칠 전 레코드 가게에서 구한 야마시타 타츠로 LP 앨범 한 장을 두 분에게 선물했다.


그리고 두 분에게 진심을 담아 감사인사를 전했다. 두 분 덕분에 너무 행복했고, 더 기억에 남는 여행이 될 거 같다고. 서투른 영어로 전한 인사였지만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히셨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짧디 짧은 만남이었지만 순식 간에 정이 들었나 보다. 허탈하고 서운한 감정이 밀려왔다. 이번이 생에 마지막 여행이 될 것 같다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언젠가 영국에 오게 된다면 꼭 만나자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아쉬운 작별을 한 뒤, 한동안은 복받치는 감정에 여행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그들 같은 삶

나는 그들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랑하는 이와 여행을 떠나 소소하게 저녁을 요리하며 다음 일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렇게 여행과 함께 행복한 여생을 보내는 삶. 그리고 그들처럼 처음 본 이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울 수 있는 사람이. 두 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여행 중에 만난 가장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분을 꼭 다시 만날 수 있길 바라며. 





● 함께 한 플레이리스트


aqualina - comfort

The 1975 - Inside Your Mind

H.E.R - Best Pard (Feat. Daniel Caesar)

MAC MILLER - My Favorite Part (Feat. Ariana Grande)

매거진의 이전글 #7 후회와 망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