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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호티브 Jan 27. 2019

#11 떠나보내는 방법

9만 원을 버린 날

못된 습관

나는 못된 습관을 하나 가지고 있다. 이것을 '못되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감정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시작해 텅 비워버리니 일단은 '못된' 것이 맞다고 하자.


무언가와 이별할 때 나는 내가 향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까지 가라앉곤 한다. 그렇게 가라앉는 동안 현재와 미래는 내 안중에 없다. 그저 지나간 과거의 그 순간을 끊임없이 회상하고 희뿌연 연기처럼 흩어지려 하는 기억을 잡으려 무던히도 애쓴다.


나는 그렇게 어떠한 것에 대한 내 감정이 고갈돼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을 정도로 보이지 않는 바닥을 향해 내려가 기어코 바닥을 찍고 난 뒤, 내가 다시 그곳을 떠나 수면 위로 떠오를 때까지 천천히 기다린다.


살아온 모든 순간이 그랬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한동안 중학교 때의 추억에 사로잡혀 있었고, 대학교에 들어가서는 고등학교 때로 돌아가고 싶어 우울해했고, 대학교를 졸업하자 여태까지 보다 더욱 깊숙이 내려앉아 끝을 모르고 아련한 추억 속 어딘가를 배회했다.


뿐만 아니라 내가 잃어버린 물건들이 아깝고 후회돼 다른 것을 사지 못했고, 내가 좋아하던 TV 프로그램이나 영화가 끝나면 더 이상 새롭게 만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워 몇 번이고 처음부터 정주행 했다. 이쯤 되면 지나간 연인을 잊는 방식 또한 얼마나 길었을 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교토도 마찬가지

교토와의 이별도 마찬가지였다. 나를 뒤쫓고 있던 이별의 순간은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내 뒤에 달라붙어 있다 마지막에서야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마주하자 덜컥 돌아가야 할 때가 온 것이 실감 났고, 여태 그렇게 살아왔듯이 현재와 미래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9만 원을 주고 산 간사이 와이드패스 5일권의 사용 기간이 아직 4일이나 남아있었다. 그러나 남은 4일이 끝나면 다음 날은 바로 교토에서 떠나야 했다. 간사이 와이드패스를 사용해서 가야 할 곳은 정해두었지만 그것은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교토가 아닌 외곽 쪽에, 더 나아가 교토가 아닌 곳도 포함된 새로운 곳들이었다. 그전까지는 그곳들도 가보고 싶어 호기심에 가득 찼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낀 순간 나는 내가 지난 한 달 가까이 아무 생각 없이 평범하게 거닐던 이 동네와의 이별이 무척이나 아쉬워 머릿속에서 새로운 곳들을 지워버렸다. 아마 시라하마에서의 하루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던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긴 한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9만 원을 버렸다. 이별이 아쉬워서. 나는 그렇게 계획한 바쁜 일정들을 모두 취소하고 자전거를 빌렸다. 그리고 카모 강을 천천히 산책하며 지금의 내 감정과 어울리는 음악을 찾아들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처음에 교토에 도착해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과거 속에 잠겨 추억이 빗어낸 신기루를 진짜 과거의 시간 속에 돌아가 있는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했다.


알고 있었다. 처음과는 분명 다른 상황과 시간이라는 것을. 그렇지만 좋았다. 영영 못 볼 줄 알았던, 영영 못 느낄 줄 알았던 감정이었으니까.


버려야 할까요?

이것이 나의 이별 방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말한 '못된 습관'이다. 이 습관을 버려야 할까? 내가 처음에 이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감정 소모가 너무 크기 때문이었다. 이별에 맞춰 감정을 모두 소모하지 못했던 나는 남은 감정을 소모하기 위해 현재에 집중하지 못했고, 미래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면서 시간을 허비하기 시작했고 결국 늦어버린 것들, 놓쳐버린 것들, 잊어버린 것들, 망쳐버린 것들이 많다.


그런데 머리와 마음속에 이 순간을 가득 담아 취해있는 것. 그것이 왜 이리도 좋은 지 모르겠다. 감정 소모가 크다는 것, 내 앞으로 에 이 습관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지만 다른 방식이 떠오르지도, 다른 방식으로 잊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내려가고 있다. 더 깊게. 교토에 실은 내 감정은 얼마나 깊을지 아직 모른다. 다시 올라오는 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알고 있다. 암흑 속에서 올라올 때 또 다른 빛이 보이면 깊게 가라앉았던 만큼 큰 숨을 들이쉬며 나는 그것을 더 확실하게 잡을 수 있다고. 


나는 그렇게 무언가를 천천히 떠나보내는 버릇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모르겠다. 버려야 하는 건지는. 그래서 그냥 두고 있을 뿐이다.




● 함께 한 플레이리스트


Yeek - Cosmic Free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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