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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호티브 Nov 26. 2018

#7 후회와 망각

우리는 참 단순해

아..


교토에서의 한 달 살이는 어느새 절반을 넘어 지나온 날보다 남은 날이 적어졌다. 그리고 그 사실은 평온하게 지냈던 나를 자극해 마음 한편을 이상한 송곳으로 후벼 파는 것만 같았다.



인간은 후회의 동물이다.


남은 날이 곧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다가오자 내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게으르게 지내왔던 것이 문득 후회스럽기 시작했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 다닐수록,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가보고 싶은 곳이 늘어 왜 진작 부지런하게 다니지 못했을까라며 나를 자책하기 시작했다.


카페에 앉아 아직 못 가본 곳을 쭉 나열했는데 이곳들을 모두 방문하려면 남은 날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정리된 내용을 보는 순간 아차 싶었고 "너무 계획이 없었던 건가?", "아까운 시간을 너무 안일하게 보냈어."와 같은 후회를 가득 담은 문장들이 마구 떠올랐다.



비단 여행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모든 일을 지나고 나서야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과제를 제출일까지, 흔히 말하는 '내일의 나'에게 넘기고 그 내일의 나는 '내일모레의 나'에게 넘겨놓고는 왜 진작하지 못했을까 하며 후회하곤 한다.


뿐만 아니라 사랑이 끝나고 나서야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떠오르며 '왜 그때 잘해주지 못했을까.', '나는 왜 그렇게 서툴렀을까?' 하는 깊은 후회에 빠지기도 하고, 마트에서 싸다고 생각해 구입한 물건을 들고 집에 가는 길에 더 싸게 파는 가게를 만나 후회하기도 한다. 그뿐이겠는가? 술을 진탕 마신 다음 날 핸드폰에 찍힌 결제 문자를 보며 머리를 부여잡기도 하고, 어려운 업무의 벽 앞에 마주 섰을 때 '진작 공부 좀 열심히 할 걸.'이라며 한숨 쉬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는 모든 일에 후회를 남기는 동물이다. 후회를 겪고 또 겪으며 다음번에는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자라고 다짐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후회하기를 반복한다.



나는 후회 없는 여행을 하고자 마음먹었고 원하던 대로 여유 넘치는 여행을 하고 있었지만, 후회는 언제나 예고 없이 문득 찾아와 마음을 심란하게 만든다.


여행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서는 더 많은 곳을 자세하게 보고 기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가득해졌고, 심란한 마음은 결국 가보고 싶은 곳만 갔던 나를 가보고 싶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유명한 곳까지 이끌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나는 봄과 가을에만 특별 개장하는 루리코인과 케이블카를 타고 히에이산에서 내려다보는 교토 전경을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리고 다음 날은 교토에서 가장 유명한 곳 중에 하나인 청수사(기요미즈데라)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이른 시간부터 루리코인을 보기 위해 늘어선 관광객들의 행렬을 보는 순간 또다시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티켓팅을 위해 30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야 했고, 티켓팅 이후 바로 관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시간 반 뒤로 정해진 시간에 관람을 할 수 있었다. 가격 역시 2,000엔으로 비쌌다.


나는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꼈고, 내가 가진 여행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매일매일이 행복했었던 나의 교토 여행은 갑자기 찾아와 마음을 흔들고 떠난 '후회' 때문에 처음으로 기분 나쁜 하루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수많은 인파를 뚫고 루리코인을 마주한 순간, 기다리며 가졌던 깊은 후회는 한순간에 달아나고 없었다. 루리코인 안에서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고 정신없이 나와 카메라를 확인하는 순간 "역시 오길 잘했어!"라는 마음이 가득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불과 30분 전의 나는 "여길 왜 온 거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나?



이 날의 풍경은 진심으로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


루리코인 관람을 기다리면서 날씨마저 흐린 것을 본 나는 여차하면 히에이산 정상은 포기하고 숙소에 돌아가고자 했다. 그만큼 기분이 심란했기에.


그러나 루리코인을 보고 난 순간,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히에이산으로 향하는 케이블카 탑승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온 나에게 히에이산은 "옛다 선물이다!"라고 말하며 무지개를 선물해주었다. 그렇게 큰 무지개는 난생처음이었고, 특히 오늘 그냥 돌아갔더라면 평생 볼 수 없었던 풍경이라고 생각하니 감동은 배가 되었고 여기까지 오기로 결정한 내가 대견했다.


그렇게 나는 후회 따위는 망각한 채로 눈 앞에 있는 아름다움을 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받은 감동이 가득 담기길 바라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히에이산까지만 보고 돌아가기로 했던 일정에 호센인 액자정원의 라이트업까지 추가해 신나게 여행하며 하루를 보냈다.




생각해보면 모든 것이 그렇다. 이별의 아픔은 새로운 사랑으로 잊히고, 월화수목금 내내 퇴사를 고민하지만 주말이 찾아오면 신나게 놀며 평일 내내 했던 고민을 잊어버린다. 그렇게 모든 것은 지나고 나면 옛날 일이자 추억이 되어 희미해지며, 더 새로운 것들이 찾아와 후회가 찾아올 수 없게끔, 잊어버리게 끔 머릿속을 가득 메운다.






나는 알고 있다. 여행의 말미에는 후회가 찾아올 거라는 것을. 


이제야 적응이 된 것 같은데, 내가 잊고 있었던 교토에서 해보고자 했던 것들, 원했던 것들이 마구 떠오르며 소소하게 카모강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글을 쓰던 순간이 끝나는 것을 무척이나 우울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후회하고 있던 내 앞에 아름다운 루리코인의 단풍과 히에이산의 무지개가 찾아온 것처럼, 어떤 것이 마법처럼 나에게 다가와 그것들을 모조리 망각할 수 있게 만들어줬으면 한다. 그렇게 믿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에서 내 앞에 어떤 후회가 찾아오더라도 다른 것들로 망각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그렇게 됐으면 한다.


인간은 그렇고 그런 동물이니까.





● 함께 한 플레이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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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리보이 - 2000/90

Pink Slip - Panama City Bea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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