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사님의 기습 질문
몇 년 전 주일날,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유유자적 유모차를 밀던 나에게 권사님 한 분이 다가오셨다. 그리고 대뜸 물어보셨다.
"사모님은 ~ 원래부터 사모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아, 그날 그곳에서, 그 권사님이 물어보실 줄이야.'
그리 생소한 질문은 아니었다. 나 자신과 수도 없이 대화를 나눠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답변할 것인지는 고민됐다. '얼마큼 솔직하게 대답해도 될까?’ 왠지 '사모다운' 답변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치만 진솔하게 답하고 싶었다.
"아니요 권사님^^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신학생이었어요."
내 대답을 들은 권사님은 별말씀 없이 지나가셨다. 뭐라 하신 말씀이 없었기에 어떤 맘이셨을지 알 길은 없다. 예상을 벗어나는 답변이었을까, 실망스러웠던 걸까, 너무 솔직해서 당황스러웠던 걸까, 별 생각이 안 들었던 걸까? 은혜의 고백이 묻어 있는 '사모다운' 답변이었어야 했을까? 지금도 이따금씩 자문해 본다. 그래도 내 답은 오늘도 똑같을 것 같다.
사실 '내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왜 하필 신학생일까?'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남편, 미안ㅋ) 지금도 가끔은 '우리 남편이 다른 직업을 가진다면?'라며 괜한 공상에 빠져볼 때도 있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도, '지금과 다르다면 우리는 더 행복할까? 더 편안하고 더 안락하고 더 윤택할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라는 생각의 침습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어쩌다 사모가 되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나도 모른다. 평생 온전히 알지 못할 수도 있다. 한 때는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나를?'이라는 질문에 괴로운 시절도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납득되면 수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몰라도 된다.'가 나의 고백이 되었다. 이 사실만큼 나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없다. 몰라도 된다는 것은 '그래도 괜찮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에 누군가가 똑같은 질문을 해온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