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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Sep 30. 2022

길상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백석의 시 한 편으로 시작된 가을 나들이

월요일 아침 남보다 일찍 출근한 친구에게서 시 한 편이 날아왔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오는 탓이다                                                                                                                                 


단톡방 수다는 "언제나 꼭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이 누구냐로 시작해서 금방 길상사로 넘어갔다.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진 김영한이라는 분이 조계종에 시주를 하여 생긴 절이 길상사라는 것이다. 사계절 아름다운 풍경과 고즈넉한 분위기로 혼자 조용히 다녀오기 좋은 곳. 카카오내비로 검색을 해보니 월요일 아침 출근길 정체를 감안해도 55분이면 도착이란다. 힘겨운 주말을 보내고 울적하던 차에 옳다구나! 하며 길을 나섰다.


#1.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 이야기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에 등장한 '고운 사람'이 누구인지는 논란이 있다. 예술가적인 재능과 훤칠한 외모를 뽐내던 모던보이 백석이 염문을 뿌린 상대가 한둘이 아니었던 것이다. 1997년 시주할 당시 길상사의 땅과 건물의 가치는 약 천억 원이었는데 아깝지 않느냐는 어느 기자의 질문에, 김영한은 "그까짓 천억 원, 그 사람 시 한 줄만도 못해!"라고 응수한 것이 널리 알려졌다. 길상사를 시주하고 남은 재산도 모두 백석문학상을 제정하는 데 썼다고 하니 그녀의 백석 사랑은 정말 대단했던가 보다. 두 사람이 정말 연인 관계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지만 김영한은 이제 백석이라는 이름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2. 사찰이지만 사찰 같지 않은 길상사

길상사는 친일파의 별장이었던 것을 김영한이 사들여 한식당으로 쓰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대원각이라는 고급 요정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삼청각, 대원각, 선운각으로 대표되는 70년대 서울의 고급 요정들은 중요한 정치적 결정이 이루어지는 밀실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파의 별장, 70년대는 정치인들의 비밀 회동 장소였던 곳이 이제는 불교 사찰이라니. 김영한이 1987년부터 시주할 뜻을 밝혔는데도, 1995년까지 법정 스님이 계속해서 고사했던 이유를 알 만하다. 이런 역사 때문인지 길상사에는 사찰 건축의 대표적 특징인 단청이 거의 없다. 입구에 세운 일주문만이 유일하게 단청을 한 모습이다.


#3. 길상사 가는 길

길상사로 가는 길은 그 자체로 상당한 모험이었다. 지도상으로는 내부순환로를 타고 홍지문터널을 지나 정릉까지만 가면 길상사는 금방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릉에서 유턴을 한 후 성북동으로 들어서니 웬만한 롤러코스터보다 더 스릴 넘치는 비탈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들어선 다음에는 후퇴할 길도 없고, 언제 끝날지 모를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드디어 길이 좀 완만해지며 정신이 좀 들자 도대체 여기가 어딘가 살펴보았다. 대사관길이라는 표지판과 세계 각국의 대사관저들이 눈에 띄었다. 미국, 중국, 영국처럼 중요한 외교 상대국들의 대사관은 4대문 안에 있지만, 상대적으로 교류가 적은 북유럽,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나라들의 대사관은 이곳에 모여있는가 보다. 한숨 돌리나 싶은 것도 잠시. 이번엔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되었다. 올라올 때와는 달리 내려가는 길의 집들은 모두 대저택이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박사장의 저택이 가파른 비탈에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저 평창동이나 한남동인가 했는데, 어쩌면 이 동네였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다 내려왔다 싶을 때쯤 다시 한번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다행히 얼마 가지 않아 오른쪽으로 갑자기 장엄한 건물이 하나 나타났다. 지장전 세 글자가 선명한 현판! 드디어 길상사에 도착한 것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조심조심 주차를 했다.


(왼쪽) 길가에 지장전이 보이면 길상사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오른쪽) 길상사에서 유일하게 단청을 한 건축물인 일주문이다. 현판에는 삼각산길상사라로 쓰여있다.


#4.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상   

삼각산길상사 현판이 붙은 일주문을 통과하니, 호리호리한 석상이 나를 반겨주었다. 발등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주름 하나 없는 통 좁은 원피스를 입은 모습이 수녀님을 연상시킨다.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보여주는 포즈와 머리에 쓴 연꽃 모양의 관이 아니었다면 관세음보살인지 짐작도 못 했을 것이다. 이 석상을 만든 사람은 최종태라는 천주교 신자인데, 종교 간 화해의 염원을 담아 이 관세음보살을 만들었다고 한다. 천주교 혜화동성당의 성모상 역시 이분의 작품인데, 길상사의 관세음보살과 쌍둥이처럼 닮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불교도 천주교도 포용적인 종교라 나같은 사람이 마음 편히 사찰과 성당을 둘러볼 수 있는 것 같다.

성모 마리아를 닮은 관세음보살상. 단순화된 형태와 옷차림이 매우 모던한 느낌을 준다.


#5. 단청이 없는 사찰

앞서 적은 것처럼 길상사는 민가였다가 요정이었다가 사찰로 변신한 탓인지 사찰 특유의 단청이 없다. 극락전, 지장전, 설법전 같은 대형 건물들은 물론 작은 건물들도 다 마찬가지다. 벽에는 흰 칠을 하고 나무에는 기름칠만 하여 정갈하고 소박한 매력은 있을지언정 화려함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길상사의 본당은 대웅전이 아니라 극락전인데, 살짝 들여다보니 스님 한분과 신도들이 법회를 하고 있었다. 연등 아래로 시주한 사람들의 이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나를 포함한 중생들에게는 언제나 바라고 소망하는 것이 많다. 그 소망 때문에 마음이 괴로운 것인데, 욕심을 버리라는 대신 기도를 하면 들어주겠다고 한다. 극락전 오른쪽으로는 수양회양나무 아래 아기 부처의 석상이 앉아 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돌 전의 아기가 마른 흙을 공중으로 던지면서 까르르까르르 웃는다. 분명 예사롭지는 않은 장면인데 묘하게도 극락전 앞마당의 평화로운 분위기와는 잘 어울리기도 했다.


길상사 극락전 전경. 실내를 들여다 보지 않고는 법당임을 느끼기 힘들다.

관세음보살 석상 뒤로는 설법전이 있다. 불교 대학으로 사용되는 건물인데, 성공회주교좌성당의 사제관처럼 가로로 기다란 단층 건물이다. 건물을 짓는 데는 아무래도 종교보다 현실적인 용도가 더 중요할 것이다.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교육을 실시하려면 불교든 천주교든 학교처럼 생긴 건물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왕족과 귀족 교육을 위해 쓰였다는 경운궁 양이재도 비슷한 외형을 갖고 있었다. 아이들의 창의성을 길러주기 위해 새로운 모습으로 학교를 디자인하려는 시도가 늘고는 있지만, 전통적인 형태도 그 나름 이유가 있어서 굳어진 것이리라.


길상7탑보탑과 설법전


#6.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의 시 중에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맞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그 시 말이다. 앞서 얘기했듯이 백석이 사랑한 여인은 한둘이 아니라, 내가 바로 그 "아름다운 나타샤"라고 주장한 사람이 많았다. 당연히 길상사를 시주한 김영한도 그중 하나다.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이 많이 내리는 날 길상헌 뒤에 뿌려 주시오"라는 유언대로 그녀의 유골은 "첫눈이 온 도량을 순백으로 장엄하던 날 길상헌 뒤쪽 언덕받이에 뿌려졌"다고 한다. 이후 세워진 그녀의 공덕비 옆에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적힌 안내판이 있다. 논란종결자란 이런 분을 두고 하는 말.


김영한은 천억 원에 달하는 땅과 건물을 시주하고, 감사의 뜻으로 염주 하나와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았다고 한다.


#7. 지장전과 공양간: 다라니 다원은 월요일에 쉽니다.

가장 큰 전각인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모시는데, 길가에서 바로 보이는 장엄한 건물이다. 지장전 아래층에는 다라니 다원과 북카페가 방문객의 쉼터 역할을 해준다. 매주 월요일은 쉰다. 제일 아래층은 선열당(공양간)으로 점심시간에 맞춰 가면 방문객도 식사 공양을 할 수 있다. 선열당 앞에는 작고 둥근 연못이 있다. 비탈에 위치한 건물이다 보니 연못이 있는 앞마당이 선큰가든(Sunken Garden)의 형태가 되었다. 길상사에는 월요일을 피해 정오 즈음

와야 식사 공양도 하고 차도 한잔 하며 부처님의 자비를 느낄  있다. 나처럼 때를 잘못 맞춰 오면 쫄쫄 굶고   모금도 마시지 못한다.  아, 공양과 시주를 하려면 현금을 약간 챙겨가는 것이 좋다. 사찰을 방문할 때마다 현금이 없어 난감했던 기억이 난다.

무심한 듯 다정한 길상사의 구석구석


길상사는 내가 가본 어떤 사찰보다도 종교적인 색채가 옅었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셨다는 석탑이 있지만, 눈에 띄지 않는 한쪽 구석에 위치했다. 범종도 있지만 사용하지 않는지 묶여있고, 화려한 단청이 빠져서인지 있는 듯 없는 듯하다. 극락전에는 법회가 한창이지만 그 앞마당에서도 잘 들리지 않을 만큼 조용하게 진행한다. 도량을 둘러보는 내내 목탁 소리도 들리지 않고 향 냄새도 풍기지 않는다.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잠시 머물다 갈 수 있는 그런 곳이다.


친구가 아침에 보내준 시 한 편에 이끌려 여기 와 앉아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한때는 친일파의 별장이었다가, 대통령과 고관대작들의 밀실을 거쳐, 이제는 모두에게 열린 명상의 공간이 된 길상사. 나의 삶도 이렇게 전개될지 어려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스릴 만점의 드라이브 끝에서 기다리는 길상사의 평온함. 지옥 같은 순간을 견디면 평화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길상사 오는 길에 거쳤던 스릴 만점의 드라이브를 역방향으로 반복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과다 분비된 아드레날린을 잠재우려고 편의점 막걸리를 한 캔 사봤다. 이름이 바밤바 밤.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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