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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Oct 13. 2022

본인이 제일 힘들다

옆에서 지켜보기 힘들다는 말은 넣어 두세요.

사법고시에 통과하고 변호사가 된 멋진 친구가 있다. 법학을 전공한 것도 아닌데 혼자 공부해서 사법고시에 통과하다니 친구의 고향 동네에 현수막을 걸었대도 비웃고 싶지 않다. 그런 친구가 작년부터 몸이 아파 일을 그만두었다. 이미 수임했던 사건 중에 재판이 끝나지 않은 것들만 마무리 지으며 건강을 돌보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흔치 않은 병이라 예후를 말하기 어렵고, 치료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 병이 전개될지 모른다고 한다.


그런 친구에게 다행히도 결혼할 사람이 있다. 가까이서 간병을 해주겠다고 살림까지 합쳤다고 한다. 얼굴은 본 적 없지만 귀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환우 카페에 가입해서 공부까지 해가며 돌본다고 하니, 친구들이 모두 그 사람을 칭송했다. 간병이 쉬운 일이 아닌데, 그 어려운 일을 자원해서 한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워 주었다. 그러자 친구가 한 마디 했다.


"그래도 환자인 내가 제일 힘들어."


20년 가까이 가족을 돌보고 챙기며 중년에 이르다 보니, 우리들은 병이 난 친구보다 간병을 하는 그 사람의 노고에 더 쉽게 몰입했던 모양이다. 미안하다 친구야.




재수생인 딸의 수능고사일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다. 지켜보는 내가 괜히 신경이 곤두서고 애가 닳는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주변에서 나를 위로하고 응원해 준다. 이렇게 우쭈쭈를 받아서인지, 지켜보는 내가 당사자인 딸보다 더 힘들다는 착각도 잠깐씩 들곤 한다. 그런데 본인이 제일 힘들다는 친구의 솔직한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김호연의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에 등장하는 오여사는 남편과 아들 때문에 속을 썩이는 중년 여성으로 묘사된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오여사에게 감정이입을 했지만, 10대 소녀인 딸아이는 달랐다. 남들 부러워하는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나와 방문 잠그고 게임만 한다면, 그 아들에게는 말 못할 사정과 자신만의 고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엄마가 닥달까지 해대면 그 아들은 얼마나 더 힘들겠냐는 것이다. 본인이 제일 힘든데, 오여사는 그걸 모른다니 답답하다고 했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은 힘든 사정이 있을 때 서로 하소연도 하고 위로도 많이 해준다. 결혼한 친구들에게는 남편과 자녀의 사정도 커다란 하소연 거리다. 한 친구는 남편이 번번이 승진에서 누락되어 속을 끓였다. 친구는 답답한 마음에 용하다는 점집을 찾아갈 정도였다. 또 어떤 친구는 자녀가 학업에 열의를 보이지 않아 힘들어했다. 아무리 뒷받침을 해줘도 아이는 엄마의 의욕만큼 따라 주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에 공부를 잘 하고 싶지 않은 아이는 없다. 공부를 잘 하면 온 세상이 칭찬하는데, 당연하지 않은가? 마찬가지로 승진 심사에서 떨어지고 싶은 남편도 없다. 승진 심사를 신청 안 했으면 모를까 일단 심사대상이라면 통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이다. 성적이 부진한 아이, 승진 심사에 탈락한 남편은 그 엄마나 아내보다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 그 고통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뿐. 그 명료한 진실을 우리는 가끔씩 잊어버린다


수험생 엄마들이여, 잊지 말자. 지켜보는 내가 아무리 애가 타도, 제일 힘든 건 본인이다. 지켜보기가 정 힘들다면, 가까운 곳으로 서너 시간 가을 산행을 다녀오자. 요 며칠 뚝 떨어진 기온 탓에 시시각각으로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yannallegre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yannalleg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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