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느님 Oct 14. 2022

힘든 내색을 안 해요?

제가요? 정말요? 왜요?

최근 부쩍 가깝게 지내온 한 친구가 말하기를, 내가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정말? 내가 그렇다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도  즐겨하지 않는 몸이지만, 이런 얘기를 듣고 보니 잠시 자아 성찰의 시간을 가지지 않을  없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친구 말이 맞았다. 나는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도 분명 세상에 불만도 많고 억울한 것도 많은 사람이었는데, 누구 못지않은 징징이에다 둘째 가라면 서러운 투덜이였던 기억도 생생한데, 어쩌다 이렇게 쿨한 척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친구의  한마디에 나는  글감이 하나 생겼구나 싶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




자아정체성이 형성된다는 사춘기 시절, 나는 친구를 만드는 가장 빠른 방법으로 내 힘든 사정을 토로하곤 했다.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어려운 집안 형편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내적 고민들을 털어놓고 나면, 그 친구와는 금세 둘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대단한 비밀은 아니지만, 내가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으며 컸고 그래서 오늘날의 내가 되었어. 이런 나를 친구로 받아주겠니? 하는 식의 프로포즈였던 셈이다.


그런 나에게 자기 고백이 차가운 비웃음으로 돌아오는 때가 왔다. '여성과 사회'라는 교양 수업이었는데 교수님은 자신이 겪었던 성차별의 경험을 공유해 보라고 하셨다. 남아선호가 대단한 집안에서 나고 란 나는 그나마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사례를  가지 골라 공유했는데, 교수님은 뜻밖에도 코웃음을 쳤다. 지나친 과장 아니냐, 요즘 그런 집이 어디 있냐는 거였다.   남짓 수강하는 대형 강의에서 어렵게 꺼낸 개인사를 무참히 짓밟힌 나는 위축되기도 위축되었지만, 그보다도 나의 이야기란 것이 섣불리 꺼내놓기만 한다고 공감을 얻을  있는  아님을 깨달았지 싶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한  직장에는 금수저가 무척 많았다. 누구누구는 아버지가 누구라더라 하는 얘기는 공공연한 비밀이었고, 금수저도 낙하산도 아닌 직원들 사이에는 모종의 연대의식이 솟아났다. 나는  평범한 직원  하나를 골라   친해질 요량으로 사춘기 시절 애용하던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그런데  동료 역시 생각보다 아주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야기에는  공감하지 못했다. 가십거리가  만한 비밀을 알려준 것도 아닌데, 나는 괜히 나의 약점만 보여준  같아 후회가 밀려왔다. 직장 동료란, 친구인 동시에 경쟁자라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던 것이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유학 길을 따라나섰다. 미국에 도착해서 처음 만난 남편 친구는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여자가 유학생 아내"라는 말로 나의 현실을 깨닫게  주었다. 나에게는  이상 직장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고, 남편을 제외하면 가족도 없었다. 이런 표현은 싫지만 나는 오직 남편에게만 "속했다." 그리고,  비자에는 떡하니 남편의 dependent(종속된 )라고 쓰여 있었다. 그런데,  남편의 신분마저도 지도교수  밖에 나면 짐을 싸서  나라를 떠나야 하는 유학생이었던 것이다. 대놓고   불쌍하다, 소리를 듣고 보니 나는 절대 힘든 내색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만에 유학생 아내가 아닌 유학생으로 변신했다.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여자로 계속  수는 없지 않은가. 남편과 같은 학교에서 공부할  있도록 시험을 보고 지원을 했다. 감사하게도 입학 허가까지는 일사천리였다. 그런데 입학허가서보다 먼저 일사천리로 도착한 것이 있었다. 임신 소식이었다. 7 초에 출산을 하고 8 말부터는 대학원생으로 수업에 나가게 되었다. 갓난아이를 남의 손에 맡기고, 유축기와 함께 도시락을 싸들고 꿋꿋하게 학교에 나갔다. 힘든 내색을  봐야 "집에서 애나 키우라" 소리를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남편이 학위를 마치고 취업이 되어 먼저 귀국을 했다. 나는 아직 학위 논문을 써야 했고, 아이와 함께 미국에 남았다. 월세를 내며 아이를 키우자니 돈이 꽤나 필요했는데, 남편도 한국에서 집이며 세간을 마련하느라 여유가 없었다. 넉넉하게 송금을 해줄 수도 없는데 금융위기로 환율은 하늘 높은 줄 몰랐다. 미국의 경제 사정도 최악이어서 주립 대학들이 신임 교수 임용을 줄줄이 취소했다. 운 좋게도 나는 재정이 충분한 사립대학에 임용되었다. 1년 안에 박사 논문을 마치는 조건이었다. 나를 대신해 그 자리에 오고 싶다는 사람이 줄을 선 상황에서 힘든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웃는 얼굴로 아이를 키우고 일을 하며 학위를 마쳤고, 한국에 돌아올 길도 마련했다.




나의 고군분투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 지도교수님이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유학생이었다가 학위를 마치고 미국에 정착하신 교수님은 나에게 정말 많은 지원을 해주셨다. 논문 지도는 물론이거니와 연구 조교, 수업 조교 같은 일자리도 주셨고, 조건 없이 제공하는 장학금인 fellowship도 추가로 받을 수 있게 해 주셨다.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 없이 유학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언제나 최고의 추천서를 써주셨고, 그래서 장학금이든 취업이든 결과가 좋았다. 그런 나의 지도교수님이 어느 날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누구나 자기 몫의 짐을 짊어지고 인생길을 가. 다들 자기 짐이 제일 무겁다고 생각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아. 누군가 자기 짐과 너의 짐을 바꾸자고 하면 선뜻 그럴 수 있겠니?"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등에 얹힌 보이지 않는 짐을 상상했다.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면, 저 사람 등에는 어떤 짐이 지워져 있을까 생각했다. 작고 가벼운 봇짐 하나 지고 가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내 등에 짊어진 것 중 어느 하나 버릴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깨달았다. 어느 날 나는 냉장고를 등에 지고 설악산을 걸어서 오른다는 어느 지겟꾼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미디어를 통해 널리 알려진 그분의 이야기에 나는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관념으로만 존재했던 삶의 무게가 100 킬로그램의 냉장고가 되어 그분의 자그마한 등에 얹힌 것을 눈으로 보니, 과연 내 인생에 불평할 것이 무엇이 있었는지 숙연해졌다.




설악산 지겟꾼만큼은 아니더라도, 내 어머니 역시 험난한 삶을 살아오셨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결혼하자마자 625가 터졌고, 그래서 신혼의 남편을 전쟁터로 보냈다. 정식 교육도 받지 못한 어머니는 한 번씩 아주 현명한 말씀을 하셨는데, 그중 하나가 "내 눈 내가 찔렀지. 누굴 원망해?"이다. 내가 어떤 환경에 어떤 신체조건으로 태어났는지는 내 선택이 아니지만, 성인이 되어 겪은 일들은 누가 뭐래도 내 선택에 따른 결과였다. 장래가 불투명한 유학생 남편과 결혼한 것도, 주제넘게 덜컥 임신을 한 것도, 갓난아기를 남의 손에 맡겨 가며 공부를 한 것도, 굳이 박사 학위까지 하겠다고 기를 쓴 것도, 남의 나라에서 싱글맘으로 버틴 것도 모두 나의 선택이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느냐고 묻는다면, 당시에는 다른 길이 보이지 않았다고 밖에 대답할 말이 없다. 하지만, 다른 길을 찾지 못한 것도 결국은 내가 아닌가.


“내 눈 내가 찔렀지"와 "누구나 자기 몫의 짐을 지고 간다”는 결국 내 삶의 태도를 이루는 근간이 되었다. 불평도 하지 않고, 호들갑도 떨지 않으며 나의 삶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려고 애쓰게 되었다.


이렇다 보니 주변 사람들에게 서운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이제 겨우 사춘기를 빠져나온 딸이 자기 처지를 비관해 눈물바람을 할 때 나는 누구나 자기 몫의 짐을 지고 간다는 소리를 했다. 딸은 집이 떠나가도록 더더욱 서럽게 울었다. 내가 잘못했다. 지금도 반성하고 있다.


제 욕심에 하는 일을 힘들다고 하는 사람에겐 정 떨어지는 소리도 했다. 더 높이 올라가려고, 더 유명해지려고, 돈을 더 많이 벌려고 아등바등하면서 힘들다길래 “그렇게 힘들면 좀 덜 벌고, 덜 출세하면 되지 그래"라고 했다. 그랬더니 조용히 인연이 끊어졌다. 요즘은 그런 얘길 들으면 그냥 미소만 짓는다.




솔직히 말해서, 나도 힘들다고 투덜대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그런데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모습이 너무 못나 보인다. 일과 관련해서 힘든 내색을 하자니 능력에 비해 과분한 자리에 있다는 실토를 하는  같다. 인간관계와 관련해서 힘든 내색을 하자니  잘못은 생각 않고  탓만 하는  같다.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투덜거리자니,  나이가 되도록 세상을 조금도 변화시키지 못 했다는 자괴감이 든다.


결국 내가 힘든 내색을  하는 것은 내가 얼마나 못났는지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잠깐이나마 "괜찮아. 내가 신이야? 내로남불 인지상정이고, 누워서 침을 뱉었으면 얼른 일어나 닦으면 되지!"라고 생각할 배짱이 없는 것이다. 남한테는 사람이란 본디 불완전한 존재라고 폼나는 소리를 잘도 하면서,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위로도 잘해주면서,  자신에게는 그런 너그러움이 베풀어지지가 않는다.


, 기세 좋게 앉아  글을 시작했는데,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이러니하게도  글은 글쓰기도 사실은 힘에 부치는 일임을 실토하는 글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내가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 진짜 이유는 이거였다. 의식적으로 내색하지 않아도, 내가 힘겹게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나 저절로 표가 났기 때문이었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albina___white


매거진의 이전글 본인이 제일 힘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