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에서 가로수 관리를 담당하는 분들께 올립니다.
이웃 아파트 담벼락 위에서 하루에도 서너 개씩 잘 익은 대봉감이 떨어진다. 길 가는 사람들은 터진 홍시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긴다.
길 건너 쪽으로는 은행이 말썽이다. 아무도 수확하지 않는 은행들이 인도에 떨어져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길 가는 사람들은 아무리 조심해도 바닥에 쫙 깔린 은행을 밟지 않을 재간이 없다. 그쪽으로 산책을 갔다가는 강아지 발에도 짓이겨진 은행이 묻어올까 봐 코스를 바꾸었다.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자. 그 길에서 꿈을 꾸며 걸어가리라.
을지로에는 감나무를 심어보자. 감이 익을 무렵 사랑도 익어가리라.
1982년에 가수 이용이 부른 <서울>이라는 노래다.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을지로에는 감나무를 심고, 빌딩마다 새들이 오게 하고 거리거리에 꽃이 피게 하자는 내용이다. 이 노래를 들으며 사람들은 도시 한복판에 과일이 주렁주렁 열리고 갖가지 꽃이 피며 새들이 지저귀는 천국을 상상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서울은 정말 그런 곳이 되었다. 서울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많은 도시들이 사계절 꽃이 피고, 새가 지저귀며, 가을이면 열매들이 주렁주렁 열리는, 그런 아름답고 풍요로운 곳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다. 애꿎은 이 열매들이 동네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리라는 것 말이다.
내가 자란 도시에는 가로수로 은행나무가 많았는데, 그때만 해도 나무 밑에 트럭을 세워놓고 은행을 수확해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더러는 바닥에 떨어진 은행을 주워다가 먹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탐스러운 열매들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애물단지가 되었을까?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가로수 열매를 수확하거나 떨어진 열매를 주워가는 것이 범법행위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법제처가 운영하는 알기 쉬운 생활법령정보 사이트에 소개된 2012년의 판례를 보면, 가로수로 심은 은행나무의 열매를 무단으로 따거나 떨어진 은행을 주워가게 되면 절도죄로 처벌받게 된다. 근거는 가로수가 각 지방자치단체의 소유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서울시 홈페이지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시민들은 길에 떨어진 은행을 주워서 섭취해도 되는 것으로 보인다. 가로수에 열린 은행과 감의 잔류 농약과 중금속이 안전한 수준이라는 조사 결과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서울시에서는 이 점을 꾸준히 홍보해 왔다고 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그런 홍보물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더구나 앞서 언급한 판례와는 정면충돌하는 내용이니, 선뜻 가로수 열매를 따서 혹은 주워서 먹을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가로수와 그 열매들이 지방자치단체의 관리 대상이자 소유물이라면, 그 수확과 처리에 대해서도 지방자치단체에게 책임이 있다. 이렇게 길바닥에 은행알이 뒹굴며 악취를 풍기도록 두어서는 곤란하다. 시민의 머리 위로 감이 떨어지는 위험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고마운 자연의 선물이자 훌륭한 먹거리가 쓰레기, 애물단지로 취급되는 현실이 무척 안타깝다.
가로수의 열매를 시민들이 자유롭게 수확해서 먹어도 되는 것인지, 안전하게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절도죄로 처벌된다는 것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인지 각 지자체에서 적극적인 홍보를 해 주었으면 좋겠다. 40년 전에 발표되었지만 아직도 귓전에 생생한 이용의 노래처럼, 시민들이 쉽게 이해하고 기억할 수 있는 홍보 메시지를 개발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년 가을에는 머리 위로 감 떨어질 걱정하지 않고, 으깨진 은행을 밟을까 조심하지 않고 발걸음도 가벼웁게 산책을 나가고 싶다. 혹시 내 손으로 가로수의 감을 따서 이웃과 나눠 먹는 행사가 있다면 누구보다 먼저 참가 신청을 할 것이다.
P.S. 이 글을 쓴지 사흘 만에 긴 산책을 나갔다가 우리 구청에서 붙인 현수막을 보았습니다. 가로수의 감을 따면 절취에 해당한다네요. 내년 가을에는 좀 달라져 있기를 바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