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갑은 아직 멀었습니다.
첫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가 결혼 소식을 알려왔다. 나보다 나이도 많고 직급도 높았으며, 남자이니 군대도 다녀왔을 터. 대충 계산해도 내일모레 환갑인데 결혼이 웬 말인가! 나는 축하의 말보다 이 나이에 왜 굳이 꼭 결혼을 하려는가, 하며 곱지 않은 질문부터 발사했다. 선배는 웃음을 참지 못하며 사람들이 다 몇 번째 결혼이냐고 묻는단다. 물론 첫 번째 결혼이고, 아주 높은 확률로 마지막 결혼이다.
나에게는 달라도 달라도 너무 달라서 애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둘 있는데, 이 선배가 그중 하나다. 내가 신입사원으로 첫 발령을 받은 팀에서 이 선배는 대리급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었다. 대체로 명문대를 졸업하고 달변에다가 외모도 준수한, 딱 봐도 엘리트처럼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한 회사에서 이 선배의 존재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나도 이 선배와 더불어 조금 튀어 보이는 편에 들었다.)
우선 용모. 검은 모자에 검은 점퍼, 블랙진에 검은 구두를 즐겨 착용했는데, 문제는 그 위생 상태가 다소 불량했던 것이다. 검은 옷은 의외로 얼룩과 먼지와 주름을 감춰주지 않는다. 우리 팀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았지만, 윗선에서는 영 탐탁지 않게 보았다. 클라이언트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에서 용모의 기준은 단정함을 넘어 좀 있어 보여야 한다고까지 생각했던 것이다. 고위급 임원들은 지나가다 선배가 눈에 띄면 대놓고 혀를 차거나 눈총을 보내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근태.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벽까지 야근을 하고는 점심때쯤에 슬그머니 나타나는 것이 이 선배의 특기였다. 아무리 야근을 했다 해도 출근이 늦는 것은 곱게 보지 않는다. 하지만, 지방에서 올라와 혼자 살던 선배는 아침에 깨워 줄 사람도 없고, 살림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 계속되는 야근에 갈아입을 옷이 없는 일도 흔했다. 앞서 얘기한 용모 문제도 이제 이해가 될 것이다. 깨워주고 살림 도와주는 사람 없기는 나도 마찬가지여서 가끔 지각을 했는데, 선배 덕분에 나는 상대적으로 성실해 보였다.
세 번째는 말투. 나도 서울 출신은 아니고, 우리 팀에는 제주도 출신도 있었지만 모두 억양까지 완벽한 표준어를 썼다. 그런데 이 선배는 몇 마디 인사만 나누어도 고향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그때는 내가 어려서 사투리가 문제 되는지 몰랐지만, 특정 지역의 사투리를 쓰면 알게 모르게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선배는 사투리를 고칠 생각도 없었지만, 고치려고 했어도 고쳐질 수준의 사투리가 아니었다.
이런 약점을 모두 상쇄시키고도 남는 선배의 장점은 넘치는 열정과 반짝이는 아이디어였다. 다른 사람이 아이디어 세 개를 가져올 때 선배는 열 개, 스무 개를 가져왔다. 선배의 아이디어는 언제나 번뜩였고, 때로는 엉뚱했지만 다른 팀원들이 내는 뻔한 아이디어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까지 모범생으로만 살아왔던 나는 교과서적인 아이디어밖에 제시하지 못했는데, 선배는 거기에 유머와 위트를 더하고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얹어서 그럴듯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우리가 선배를 사랑한 것은 꼭 업무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배는 내가 스무 살이 넘어 만난 사람 중에 그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솔직했다.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는 법 없었고, 도움을 요청하는 데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술을 마시면 언제나 자신의 야심 찬 포부를 늘어놓았는데, 그 속에는 언제나 나도 있고 다른 팀원들도 있었다. "엄마, 내가 성공하면 ~해 줄게", "여보 내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 해줄게" 하는 것처럼 선배의 성공 시나리오에는 언제나 우리가 수혜자로 등장했다. 나는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묘하게 따뜻함과 든든함을 느끼곤 했다.
미대를 졸업하고 디자이너로서 커리어를 시작한 선배는 어느 날, 디자인에는 미래가 없다며 영상 PD로 커리어를 전환하겠다고 했다. 회사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선배는 경력직인 데다가 차장으로 승진까지 한 상태라서 새로운 직무를 배워 능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팀장이 전력을 다해 지원사격을 해 주었고, 비공식적으로나마 한번 해보라는 승인이 떨어졌다. 처음 만든 몇몇 영상은 놀라울 것도 없이 대학생 습작 수준이었다. 회사에서는 압박이 심했고, 선배는 결국 영상 프로덕션으로 이직했다. 그때 이미 서른이 넘은 나이였지만 스무 살짜리 조감독처럼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영상 제작을 배웠다.
내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쯤 선배는 어엿한 프로덕션의 대표 감독이 되어 있었다. 디자인을 계속했던 동기들은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설 자리가 점점 줄어들었다고 토로했다. 하지만 선배는 무모해 보였던 커리어 전환을 성공적으로 해내고, 영상 감독으로서 자리를 잡았다. 습관이란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어서 여전히 밤늦게까지 일하고, 술도 많이 마시고, 점심때쯤 출근해 해장을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집에서 돌봐주는 사람이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옷차림도 큰 차이 없었지만, 프로덕션 감독이란 그래도 되는 자리였다. 그리고 이제는 애지중지하는 고가의 명품 옷도 제법 있었고, 중요한 날에는 한 번씩 잘 차려입고 나타날 줄도 알았다.
결혼식은 강남 한복판의 대형 웨딩홀에서 성대하게 진행되었다. 오랫동안 한우물만 팠던 신랑을 축하해 주러 업계 동료와 선후배들이 참 많이도 왔다. 업계를 떠난 지 20년이나 지났지만, 나에게도 반가운 인사를 나눌 얼굴들이 적잖이 있었다. 그중에는 대표 이사, 임원 명함을 내미는 사람도 많았다. 20년은 그런 세월이었다.
결혼식은 시종일관 흥겹게 진행되었다. 과감하게도 와인색 슈트를 입고 콧수염을 기른 신랑은 싸이의 노래 <연예인>을 배경음악으로 입장했다. 중간에 잠깐 춤이라도 추려나 했는데, 춤은커녕 어찌나 긴장을 했는지 군인처럼 뻣뻣하게 걸어 들어왔다. 박수와 웃음, 환호성이 그치지 않았다. 축가는 2AM 창민이 이적의 <다행이다>를 불렀다.
신부는 신랑보다 12살 어린 미모의 여성이었다. 키가 크고 목이 긴 신부는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결혼식과 축사는 온통 신랑 얘기였지만, 리셉션에서 사람들은 모두 신부의 미모를 칭송했다. 직업이 모델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많았는데 내가 들은 바로는 그렇지 않았다. 역시 여자는 외모인가, 하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을 관통하는 콘셉트가 하나 있었다면, "신랑을 부탁해"였다. 선배와 절친한 분들이 사회를 보고 축사를 했기 때문에 솔직한 심정과 경험담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마이크를 잡지 않았는데, 모두들 같은 생각이었으므로 나까지 보탤 필요가 없었다. 신랑은 공식적으로 "손이 많이 가는 사람"으로 지칭되었고, 그동안 신랑을 챙겨 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해방을 선언했다. 이제 신랑은 신부의 손에 맡겨졌다. 다들 홀가분하다고 만세를 불렀다. 신랑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다 알고 있던 신부는 큰 웃음으로 돌봄의 책임을 받아들였다.
선배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선배를 애정하는 것은 나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귀찮다 귀찮다 하면서도 밥은 제대로 먹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일은 끊이지 않고 잘 들어오는지, 힘들게 번 돈을 허투루 쓰지 않고 잘 모으고는 있는지... 선배는 그런 걸 챙겨주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다. 아들이 세상에 나가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걸 확인하고 선배의 어머니는 얼마나 마음이 뭉클했을까.
축사를 하신 분은 신랑의 나이가 비밀이라고 했다. 축하 화환 중에는 "신랑은 도둑이다! 신고해 주세요!! 혼인신고~"라는 메시지가 붙은 것도 있었다. 다들 나와 비슷하게 계산기를 두드렸다면 신랑의 나이가 환갑쯤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버님이 경찰 공무원으로 순직을 하셔서 병역 혜택을 받은 모양이다. 그래서 든 생각인데, 신랑의 나이를 이제라도 밝히는 게 낫지 않을까?
여러분, 신랑의 나이는 쉰다섯입니다~ 환갑은 아직 멀었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