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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Nov 04. 2022

내 친구 이재용

친구 사이에 재산 내역을 공유하는 것은 아니니 누가 얼마나 부자인지 알 길은 사실 없다. 그런데도 어쩌다 보니 부자로 뇌리에 박혀버린 친구가 하나 있다. "우리 중엔 네가 이재용이다"라고 했더니, 자기는 정용진이 더 좋은데 그렇게는 안 되겠냐고 한다. 안 된다. 이름이란 상징인데, 정용진보다는 이재용이 순수하게 "부자"라는 뜻에 더 걸맞다. 정용진, 하면 연상되는 것이 부자 외에도 많기 때문이다.


내 친구 이재용이 얼마나 부자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부자를 가까이에서 관찰하고 따라 하면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데, 내가 아직 부자가 되지 못한 것을 보면 이재용은 어쩌면 대단한 부자는 아닌지도 모르겠다. 부자든 아니든 상관없이 나는 이재용이 내 친구라서 좋다. 남편 자랑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라고 했지만, 친구 자랑을 하지 말란 소리는 못 들어봤다. 그래서 오늘은 이 친구 자랑을 해보려고 한다.




그녀는 첫 등장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30년 전 신입생 환영회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금목걸이, 금반지는 물론이거니와 금팔찌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장신구들은 그 시절 내 또래가 흔히 착용하던 18K나 24K와는 차원이 다른 눈부심을 내뿜었다. 그 때문인지 한 선배가 "넌 삼수냐?"는 뾰족한 말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 현역인데요!" 이재용은 전혀 기죽지 않았고, 발언권을 얻은 김에 그 장신구들은 금은방을 하시는 부모님이 주신 것이라는 해명까지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이재용은 첫 만남부터 내 머릿속에 “부잣집 딸"로 각인이 되어 버렸다.


이후로도 그녀는 예사롭지 않은 옷차림으로 나의 눈길을 끌었다. 다리가 길고 늘씬한 이재용은 미니스커트와 하이힐 차림으로 학교에 오는 날이 많았다. 그녀의 옷차림에서 내가 가장 주목한 것은, 변태스럽게도, 유난히 반짝이는 스타킹이었다. 당시 신상이었던 고탄력 스타킹은 다리에 착 달라붙어 날씬해 보이고 올이 쉽게 나가지 않아 내구성도 좋았지만, 대신 일반 스타킹보다 더 비쌌다. 가성비 차원에서는 수명이 짧은 일반 스타킹보다 고탄력 스타킹이 나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확증편향은 스타킹마저도 그녀를 부자로 보이게 하는 마법을 부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이재용으로 굳어진 사건이 있었다. 집을 떠나 서울에서 대학생활을 하는 그녀와 남동생을 위해 부모님께서 아파트를 사 주셨다는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보통 기숙사나 하숙집에서 지냈고, 자취를 하는 친구들은 옥탑방이나 반지하에도 많이 살았다. 형편이 좋은 친구라 봐야 신축 빌라에 화장실이 딸린 방 하나를 전세로 사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재용은 비록 멀기는 했지만 2호선 지하철을 한 번만 타도 학교에 올 수 있는 곳에 무려 아파트를 사주신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서울 아파트에 대한 선망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재용이 어머님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소원해졌다. 내가 해외에 머무르는 동안 016, 017, 019로 시작하던 전화번호가 사라졌고, 이메일도 한메일, 네이트, 천리안, 핫메일에서 직장 메일과 지메일로 갈아탔다. 2012년 즈음에는 안부를 주고받는 고등학교 동창도, 대학시절 친구도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연락처가 살아있었다 해도 다들 아이를 키우며 커리어를 유지하려 안간힘을 쓰느라 친구를 찾을 여유가 없던 시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직장 메일에서 이재용이 보낸 메시지를 발견했다. 구글 검색을 통해 나를 찾았다는 것이다. 대단한 유명인사가 아니라도 이름과 직장 정도는 쉽게 검색이 된다. 이재용은 대학 때 친구들을 한 번씩 구글 검색해 보는 게 취미라고 했다. 사실 나는 그런 짓(!)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덕분에 우리는 십여 년간 끊어졌던 인연을 다시 이어가게 되었다.


연락 없이 지낸 십여 년간 우리는 각자 육아와 가사와 커리어를 저글링하며 비슷하게 살아온 탓에 공감할 부분이 많았다. 이재용은 내가 사는 곳까지 꽤나 먼 길을 손수 만든 김치볶음과 고추장볶음을 들고 찾아왔다. 전날 저녁 이마트에 가서 키가 작고 통이 넓은 유리병을 사다가 예쁘게 포장까지 했다. 친정 엄마나 언니들에게도 받아보지 못한 반찬 선물을 받아 들고 나는 가슴이 찡했다. 자기도 아이를 둘이나 키우며 녹록지 않은 삶인데, 이걸 챙겨 올 생각을 하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친구이지만 가족처럼 구는 사람에게 유난히 약한 편이라 그날 이재용에게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


이후로도 이재용은 여러 차례 나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지금의 나처럼 이재용이 연구년이고 그녀의 큰 아들이 재수를 하던 어느 가을날에는 나의 직장 근처로 찾아와 같이 단풍 구경을 했다. 어떤 날은 우리 집 가까이에서 공연하는 뮤지컬을 같이 보러 가자고 했고, 좋은 펜션이 나왔길래 예약을 했는데 같이 갈 수 있냐고 묻기도 했다. 그녀가 사는 대치동의 학원 특강 정보를 주며 내 딸을 그 학원에 보내고 그동안 자기랑 놀자고도 했다. 둘 다 무척 바쁜 시기여서 그녀의 고마운 제안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하지만 수시로 “나랑 놀자!”고 해주는 이재용 덕분에 나는 상상만으로도 숨통이 트이며 여유를 찾곤 했다.


그러고 보니 이재용은 선물하기에 일가견이 있다. 지나가다 1+1 행사를 하길래 샀다며 보습 크림을 주기도 하고, 몇 주에 걸쳐 내 반려견의 초상화도 그려 주었다. 내 딸을 처음 만날 때도 작고 반짝이는 노트와 필기구를 "오다 주웠다"라고 적힌 쇼핑백에 넣어서 주었다. 한 마디로 크고 작은 선물을 일상적으로 하는 사람이 이재용이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계신 시부모님께는 수박 반 통, 포장해온 비빔국수도 그릇에 나누어 담아 남편 손에 쥐어서 보낸다. 생신에는 피부과에 모시고 가서 젊음을 선물해 드리는 센스도 발휘했다.


이재용이 언제나 소소한 선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선물이 되겠다 싶은 물건은 값이 좀 나가더라도 한 번에 대량 구매를 해 놓기도 한다. 예를 들어, 적당한 가격대의 미니 스카프(에르메스라고 들었다!), 오래 두어도 가치가 변하지 않는 금목걸이 같은 것들을 여러 개 사놓았다가 중요한 날을 맞은 올케, 시누이 등에게 준다고 한다. 한 번은 이재용이 친구들 모임에 거대한 다이아몬드 반지를 끼고 온 적이 있는데, 자신이 시어머니께 선물해 드렸던 것을 최근에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재용의 선물은 그 스펙트럼을 가늠하기 어렵다.


이재용이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은 선물만이 아니다. 그녀의 옷차림도 상당한 스펙트럼을 자랑한다. 어떤 날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샤넬을 입기도 하지만, 어떤 날은 에잇세컨즈, 자라 같은 스파 브랜드에서 산 트렌디하고 색감 좋은 옷들을 입기도 한다. 보통은 이 둘을 섞어 입어, 신발은 샤넬인데 코트는 자라인 경우도 있다. 그래서 만날 때마다 그녀의 옷차림은 이야깃거리가 되어준다.


이런 이재용이  번은 알쏭달쏭한 옷을 입고 나왔다. 반짝이는 샤넬 로고가 가슴팍에 새겨진 검정 티셔츠였는데, 분명  인 것 같지만 희한하게도 먼지가 많이 들러붙은 것이다. '저건 샤넬에서 주는 사은품인가? 아니면 우리 재용이가 설마 짝퉁을 입었나?' 나는 마음속으로만 궁금해하고 묻지는 않았다. 그런데 머지 않아 비슷한 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만나고 보니, 도저히 궁금증을 을 수 없었다. 그래서 재용이에게 물어보니, 그것도 엄연히 정가를 지불하고  제품이라고 했다. 내친김에 너도 샤넬 들어가려면 줄을 서야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렇지 않단다. 옷이나 보석류를 사는 고객은 줄을 서지 않고 바로 입장한다는 것이. 나는 이 낯뜨거운 질문과 대답을 아무렇지 않게 주고받을  있는 재용이가  친구라서  좋다.




올해는 내 딸과 이재용의 둘째 아들이 재수를 하고 있다. 재용이는 큰 아들도 재수를 시켜봐서 나보다 훨씬 여유로운 마음으로 둘째 아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녀가 나에게 했던 말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명언은 "좋은 엄마의 첫 번째 조건은 명랑함"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용돈을 달라는 둘째에게 재용이는 "결혼 축하해요"라고 쓴 봉투를 주었다. 나도 명랑함이라면 빠지지 않는 사람인데, 요즘은 내면의 명랑함은 물론이거니와 표면상의 명랑함도 유지하기가 어렵다. 그래도 재용이의 이런 에피소드를 들으면 남아있는 한 방울의 명랑함이나마 끌어모으게 된다.


다시 생각해 보니 재용이 옆에 있어도 내가 부자가 되지는 못했다는 취소해야겠다. 나의 재산은 불어나지 않았어도 재용이 덕분에 나는 살아가는 즐거움을 많이 느꼈고, 다른 사람에게 베풀  아는 마음의 여유를 배웠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명랑함을 잃지 않도록 마음을 고쳐먹곤 한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정도면 "마음이 부자" 사람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아닌가?




이번 이태원 참사로 이재용의 외국인 학생이 두 명이나 희생되었다. 가슴 가득한 슬픔을 안고도 여러 가지 행정 절차를 조율해야 하는 그 사정을 상상하기 어렵다. 이 글이 조금이나마 재용이의 마음을 밝혀 주었으면 좋겠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raquelraclet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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