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애기'라는 이름의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온 몸이 흰 털로 덮여있는 3.7에서 3.9킬로그램 사이를 오가는 열여섯 살의 이 고양이는 지금도 다른 고양이들에 비해서 무척 작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작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애기는 생후 2개월령의 300그람이 채 되지 않는 새끼고양이었고 그리 크지 않은 내 손바닥이 애기의 우주가 될 수도 있을 만큼 작고도 작았다. 애기는 송파구 가락시장 근처의 가정집에서 터키쉬 앙고라 엄마와 아메리칸 숏헤어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잡종' 혹은 '믹스묘'라 흔히 부르는 ‘독립혈통’ 고양이로서 2007년 당시 책임비 5만원을 주고 데려왔다. 아직 소녀티가 가시지 않은 스무 살 가량의 전주인이 스쿠터를 도로변에 잠시 세우고, 애기를 크로스백에서 꺼내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8차선 도로 위를 무섭게 오고가던 큰 차들과 붉은 보도블록 위에 얹어진 왼쪽 다리, 그리고 머리 위 헬맷이 하얀 색이었다는 것까지… 나는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희고 작고 보드라운 200그람 남짓의 생명체를 미리 준비해 온 캐리어에 넣고 2호선에서 4호선으로 갈아타며 13개 역을 지나 이동했다. 애기는 엄마, 아빠와 떨어진 게 서글퍼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알 수 없는 작은 공간에 갇힌 채 어딘가로 가는 것이 무서워서인지 단 1초도 쉬지 않고 울었다. 우는 소리가 어찌나 우렁차던지 오는 내내 고개를 푹 숙이고 다른 승객들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해야 했다.
그 작던 애기에게는 본인의 몸보다 스무 배 가량 더 큰, 무려 6킬로그램이 넘는 친구 - 라 해야 할지, 적이라 해야 할지 - 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앨리였다. '그'라는 3인칭 대명사를 보고 이미 눈치 채신 것처럼 앨리는 숫컷이었다. 2007년 어느 날, 앨리를 먼저 데려오고, 앨리가 혼자 있을 때 외로울 것 같아서 애기를 데려온 것이다. 그러니까 애기가 우리집에 처음 오던 날, 몸집이 크고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변덕스러운 성격을 가진 숫컷 러시안블루 한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 글은 2007년부터 지금까지 내 곁에서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는 애기의 시간을 기록하기 위한 것이면서, 동시에 2019년에 멈춘 앨리의 시간을 기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어떤 영속적인 순간들, 어떤 사람들, 어떤 날들을 제외하곤 기록되지 않은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동물들은 죽고 집은 팔리고 아이들은 자라고 심지어 부부도 사라집닌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 시가 남아 있습니다.
- '소설을 쓰고 싶다면' (제임스 설터, 마음산책)
흔히 ‘작가들의 작가’로 불리는 소설가 제임스 설터의 말처럼 기록되지 않은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반대로, 기록한다면… 제대로 기록한다면… 이미 사라진 것들도 되돌아올 수 있다. 되돌아올 것이다. 아니, 이미 되돌아와 있다. 이렇게 기억하고 기록하는 순간, 예의 그 소란하고 개구지던 앨리의 시간은 내 곁에서 다시 흐르기 시작한다. 앨리는 이미 내 곁에 와있다. 품에 안기는 걸 좋아해서 하루에 몇 시간씩 내 무릎에 앉아있던 회색빛의 보드라운 시간의 감촉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나는 글쓰기의 마법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