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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Oct 09. 2023

전여빈,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전여빈은 그렇게 가고자 하는 길로 나아간다고 믿고 있다.

저마다 각자 분주하던 화보 촬영 현장의 분위기가 촬영 준비를 마친 배우의 등장과 함께 숨을 고른다. 컷이 전환되고 새로운 시퀀스로 들어가듯 현장의 공기가 변한다. 각기 달리 향하던 시선이 한 곳으로 수렴하는 가운데, 전여빈이 거기 있었다. 카메라를 마주하고 조명이 집중되고 시선이 모이는 곳에 자리한 전여빈은 자신을 향한 일사불란한 시선 속에서 홀로 고요하게 몰입하고 있었다. 


“평소 핸드폰 카메라는 낯설 때가 있지만 이렇게 세트와 조명을 통해 전해지는 무드가 있고, 어느 정도 환경이 갖춰진 스튜디오에서 스틸 카메라 앞에 서는 건 낯설지 않은 거 같아요.” 방금 막 전여빈이 마치고 올라온 화보 촬영은 레트로 필름 룩 콘셉트라고 했다. 전여빈은 1970년대 영화 촬영장을 주무대로 삼은 김지운 감독의 신작 <거미집>에서 영화사 신성필림의 후계자 신미도를 연기했다. 흥미롭게도 <거미집>은 <거미집>이라는 영화 속 영화를 찍는 상황 자체가 주요한 줄기를 이루는 영화다. 한 편의 영화 안에 또 다른 영화가 있는, 액자 구성의 영화인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를 만드는 구성원이 되고 싶어서 배우가 되길 마음먹었던 거니까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런 열망이 느껴지는 작품 속에 자리한 캐릭터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꿈꿔본 적도 있어요. <그들이 사는 세상> 같은 드라마나 <시네마 천국> 같은 영화나 올해 개봉한 <파벨만스>처럼요. 그런데 <거미집>이 저에게 그런 환경을 제공한 거죠.” <거미집>은 영화의 결말을 다시 찍으면 걸작이 나올 수 있다고 믿는 감독으로 인해 벌어지는 해프닝을 그린 코미디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이 단순히 웃기고 싶어서 이런 영화를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거미집>이 현대영화에서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1.66:1의 비율을 선택했다는 건 모종의 힌트처럼 보인다. 동시에 흑백과 컬러가 교차편집 된다는 사실 역시 1970년대라는 시대성 자체를 두 갈래의 영화적 체험으로 제시하려는 의도를 예감하게 만든다. 오직 영화를 사랑하는 이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 그리고 그런 감독의 의도 역시 영화를 사랑하는 배우에게 충실히 전달되는 경험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문득 궁금했다. 


“감독님께서 칸영화제 기자회견에서 이런 비율을 왜 선택했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제가 ‘얼빠’에요.”(웃음) 배우의 얼굴을 너무 사랑해서 그 비율을 선택했다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감독님께서 배우를 정말 많이 아끼신다고 느꼈어요. 특별히 말씀을 많이 하시는 편도 아니지만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 같은 게 그냥 느껴질 때가 있더라고요.”

전여빈이 연기한 신미도는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모두의 바람을 거슬러 올라가는 존재다. 영화의 결말을 다시 찍으면 걸작이 될 수 있다는 김열 감독의 뜻을 지지하는 유일한 사람이다. 흥미롭게도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거미집>은 영화 속 캐릭터인 김열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 속 <거미집>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전여빈은 <거미집>을 찍는 동안 두 편의 동명 영화를 만드는 영화 안팎의 두 감독을 지지하고 신뢰하는 존재로서 시간을 보낸 셈이다. 스스로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캐릭터를 충분히 이해하는 시간이 필요한 여정이었을 것이다.


“미도는 연기하는 매 장면마다 생경했어요. 주변 사람들에게 굉장한 자극을 주는 동시에 그 자극을 죄다 흡수해서 스스로를 다시 방어하는 인물이에요. 그래서 그 에너지가 어떻게 폭발할지 계산이 안 되는 친구였어요. 머물러 있거나 안전해 보이면 안 되는 인물이라 매 신마다 계속 부딪혀야 했죠. 그래서 최대한 틀을 없애려 노력했고, 그만큼 큰 도전이었어요. 생생하게 터져 나가는 생명력 같은 사람이랄까요? 그런 추상적인 느낌을 받아들이면서도 제 곁에 있는 배우들과 이룬 앙상블을 해치지 않고 싶었어요. 오히려 배우들을 믿고 폭죽처럼 터지는 앙상블을 만드는데 기여하고 싶었죠.” 


지난 몇 년간 전여빈은 드라마와 영화에 거듭 출연하며 인상적인 보폭을 넓혀왔다. 언제든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듯한 활화산을 삼킨 듯한 과묵한 열연을 펼친 <죄 많은 소녀>는 전여빈의 잠재력을 알렸고, <멜로가 체질>에서는 두 발을 땅에 디딘 듯한 현실적인 당참과 섬세함을 한 몸에 담아낸 한편 <빈센조>에서는 만화 캐릭터 같은 과장된 연기톤으로 작품의 에너지를 한층 끌어올리는 에너지바 같은 존재감을 과시했다. <글리치>에서는 생동감 있는 연기력으로 기이한 미스터리를 현실적으로 위장하는 주요한 역할을 해낸다. 캐릭터에 초점을 맞추게 만드는 기질이 돋보이지만 끝내 작품의 윤곽을 벌리고 다지는 기여도를 발휘한다는 점에서 매번 탁월했다. 


“단 한 번도 연기가 쉬웠던 적은 없어요. 현장에서 애쓰고 노력하는 건 저에게 늘 당연한 일이에요. 그리고 이런 말이 좀 웃기게 들릴까 싶지만 저는 그냥 연기할 때 포기를 잘 못해요. 그래서 언젠가 경력이 좀 더 쌓이면 다 내려놓고 연기해보고도 싶어요.” 물론 뭐든 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어쩌면 겸손과 겸양이 몸에 밴 자의 입버릇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말 끝에 걸린 어떤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이 간절함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을 향한 기도처럼 들렸다. 그건 어쩌면 전여빈이 꿈과 삶의 괴리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던 불안과 절실의 시간을 지나왔다는 사실에 감정적으로 이입한 탓일지도 모른다. 

“그때는 그 약속이 저에게 절실했어요. 그렇게 부유한 환경에서 사는 것도 아니었고, 서른이 되도록 밥벌이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 결국 그만둬야 했던 거죠. 그렇다면 그때에는 잘할 수 있는 것과 꿈꾸는 것이 다르다는 걸 냉정하게 판단해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만큼 한편으로는 절실했고요. 10년 동안 배우를 꿈꿔왔는데 솔직히 포기할 엄두는 도저히 안 났거든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열심히 해야죠. 포기를 못하겠는데.(웃음)” 서른이 되기 전까지 배우로서 경제적 자립을 이루지 못하면 그만두겠다는 다짐을 했던 전여빈의 과거는 다행히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됐다. 그 시절 전여빈을 버티고 꿈꾸게 만든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렇게 말하면 제 의지가 소용없었던 것처럼 들릴까 싶기도 한데, 저는 제가 운이 좋다고 생각해요.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비롯한 어떤 운이 저에게 분명한 도움을 줘서 지금의 저를 지켜줬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러한 도움을 배반하지 않도록 제 자신을 놓지 않고 스스로 꼭 붙들고 있었던 것도 사실인 거 같아요.” 그렇다면 배우로 살아남는 삶에 대한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된 지금, 전여빈은 이제 어떤 배우로 살아가고 싶은 걸까? 


일찍이 본격적으로 배우 일을 시작하기 전에 전여빈은 연극 무대 스태프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 나름 조연출 B라는 그럴듯한 직책을 달고 있었지만 온갖 잡일을 도맡는 역할이었다. 음향이나 조명, 무대 소품은 물론 매표까지 담당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배움의 기회라 생각해서 자진해서 스태프 경험을 해봤어요. 배우로만 연기를 바라보지 않고 무대에서 벗어나 무대 밖에 있는 동료들의 시선으로 공부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거든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 이전에 어떤 배우로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이미 확고했던 것이다.


“자유롭고 싶고,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어서 연기를 했기 때문에 남의 평가에 얽매이고 싶진 않아요. 물론 남들을 무시하겠다는 말이 아니에요. 누군가 저를 평가할 수도 있고, 정의할 수도 있고, 그런 생각을 존중해야죠. 그리고 그런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귀 기울여 듣겠지만 결국 저는 제 기준에 따라 자유롭게 흘러가고 싶어요. 그렇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확장하고 표현하며 그런 나를 만나고 싶어서 배우가 된 거니까요.” 직업인으로서 배우의 길을 선택했고, 이를 통해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바람은 당연한 것이지만 비단 그것이 전여빈이 생각하는 삶의 필요조건은 아닌 것 같다. 꿈을 이뤘지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꿈. 전여빈은 아직도 되고 싶은 바가 많은 배우다. 결국 그 길에서 만나고 싶은 삶으로 다다를 것이다. 


“최근에 지인으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내가 삶에서 기대하는 것이 있는 것처럼 삶 또한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다.’ 어느 책에 나온 문장이라고 하던데 그 말이 갑자기 훅 들어오더라고요. 나라는 사람이 인격체이자 생명체로써 살아있기 때문에 삶을 꾸려가는 것 같은데 사실 어쩌면 이 삶 자체가 나라는 유기체에게 바라는 바가 있지 않을까, 제발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는, 꿈꾸고 아름답게 피어나기를 바라는 그런 소망을 갖고 있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결국 오직 사랑하는 사람만이 살아갈 것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이 바라는 길을 가리키며 살아온 사람만이. 전여빈은 이미 잘 알고 있다.


(<VOGUE KOREA> 10월호에 쓴 인터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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