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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Oct 09. 2023

정수정, 내향과 운명 너머로

정수정은 매순간을 받아들이며 현재를 살아간다.

“저는 아이 같아요. 완전.” 어린아이를 말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이’란 바로 MBTI에서 내향성을 의미한다는 알파벳 ‘I’를 지칭한 것이다. 이 말의 주인은 크리스탈 그리고 정수정, 그러니까 무대에서 관객을 사로잡는 데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이돌 가수 출신 배우가 자신이 내향적인 성향이라 고백했다는 말이다. ‘언블리버블.’ 


믿느냐, 믿지 않느냐,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누군가는 타고난 운명이 있는 것처럼 살아간다. 보다 정확하게는 그런 운명을 부추기고 내버려 두지 않는 세상의 권유와 관심이 그들을 조명받는 삶으로 밀어 올린다. 정수정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의 지금은 스스로 쫓아간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따라오며 다다른 결과다. 


“어릴 때에는 엄마가 하라고 해서 아동 모델 일도 해보고, 언니가 연습생이 돼서 연습실에 몇 번 따라갔다가 회사 권유로 연습생이 됐고, 그렇게 물 흐르듯 데뷔하게 됐죠. 그렇게 데뷔하고 나니까 작은 목표가 하나씩 생긴 거 같아요. 연기도 회사에서 시트콤 한 번 해보자고 권해서 시작한 거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은 반짝이는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눈길을 끄는 것은 그렇게 예정된 자리로 향하는 법이다. 


“원래 가수나 배우가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제 선택으로 지금 이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아이돌 가수가 돼서 무대에 올랐고, 배우가 돼서 연기를 한다. 주목을 받고, 눈길을 끈다. 물론 그러한 삶을 의지 없이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다 보니까 재미도 느끼고, 욕심도 따라오면서 이건 내가 해야 되는 일이구나 생각하게 됐어요.” 그렇게 정수정은 내향적인 성향과 외향적인 운명이 맞물린 삶을 따라왔다. 하지만 마냥 끌려온 건 아니었다.

김지운 감독의 신작 <거미집>은 1970년대 영화 촬영장을 배경에 둔 영화다. 영화의 제목과 동일한 <거미집>이라는 영화를 찍던 촬영장에서 영화의 결말을 다시 찍으면 걸작이 될 것이라 주장하는 감독으로 인해 직면한 혼란스러운 상황 자체가 주요한 사건이 되는 영화다. 그리고 정수정이 연기한 한유림은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야말로 설상가상의 존재다. 드라마와 영화 촬영을 병행하는 바쁜 스케줄 속에서 감독의 갑작스러운 재촬영 요구가 당혹스럽기만 하다. 


“겉으로만 보면 뭔가 제멋대로 굴고 너무 징징거린다고 느낄 수 있는 캐릭터이지만 자기 일에 책임감이 상당해요. 할 말 다하면서 끝내 다 해내는 타입이죠. 그래서 너무 밉지만은 않은 매력도 드러나는 인물이라 생각해요.” 정수정이 연기한 한유림은 당대의 새로운 별이다. 말 그대로 라이징 스타다. 그리고 정수정은 <거미집>을 찍는 과정에서 마치 한유림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라이징 스타의 기분에 공감할 수 있는 스타이기 때문에?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수정은 <거미집>을 촬영하는 기간 동안 드라마 <크레이지 러브>에 출연하고 있었다. 한유림처럼 영화와 드라마 촬영을 병행하는 입장이었기에 현장에서 ‘드라마 찍으러 갈게요’라는 말을 하게 됐고, 그때마다 한유림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물론 김지운 감독이 이끄는 <거미집> 촬영 현장은 영화 속 <거미집> 촬영 현장처럼 혼란스럽지 않았다. 


“처음에는 너무 긴장했어요. 저처럼 내향적인 사람 입장에서는 대선배님들도 계시고, 김지운 감독님이 만드는 영화 현장이라는 사실만으로 긴장되는 일이었거든요. 그런데 감독님과 함께 오래 작업해 온 스태프들이 알아서 착착 움직이는 분위기라 그런지 현장 분위기가 편안해서 특별히 긴장감을 느끼지 않게 되더라고요. 게다가 선배님들도 장난기가 많으시고, 맨날 모니터 뒤에서 간식 먹으면서 수다 떨고, 그렇게 처음부터 너무 자연스럽게 한 팀이 된 느낌? 정말 신기했어요.”


정수정에게 <거미집>은 저예산 독립영화로 분류된 전작 <애비규환>에 이어 극장에서 개봉하는 두 번째 영화이자 첫 상업영화로 분류될만한 경력이다. 몇 편의 드라마를 통해 배우로서의 자질을 증명한 정수정에게 <애비규환>은 작품 한 편을 온전히 끌고 갈 수 있다는 구력을 인정받게 만들어준 성과였다. 주요한 영화 시상식 여우신인상 부문에 이름을 올리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그런 의미에서 <거미집>은 보다 많은 관객을 만날 너른 기회이자 저마다 면면을 인정받은 배우들과 앙상블을 이룰 새로운 무대였다. 송강호, 임수정, 오정세, 전여빈 등 <거미집>을 채우는 그 이름들은 처음 방문한 칸 영화제에서 역시 처음으로 보게 된 <거미집>을 통해 되새긴 첫 번째 의미였다. “막상 영화에 나오는 내 모습을 보는 게 부끄러워서 숨고 싶기도 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 영화의 한 부분이 됐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았어요. 내가 이런 배우들과 함께 한 작품에 나올 수 있었다는 것, 그게 제일 큰 의미로 남게 될 거 같아요.” 


그런데 만약 <거미집>처럼, 감독이 영화의 결말을 다시 찍어야 걸작이 된다고 설득한다면? 배우 입장에서는 영화 속 상황이라 다행스러운 일 아닐까? “저라면 당연히 ‘할게요’라고 말할 거 같은데요. 사실 유림이를 연기하면서 ‘얘는 뭘 이렇게까지 싫어할까?’ 생각하기도 했거든요. 물론 자기를 속이고 촬영을 재개하려 하니까 뒤통수 맞은 기분도 들고, 배신감도 느낄 수 있겠죠. 그런데 실제로 저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다? 그럼 해야죠. 걸작을 만든다는데.” 어쩌면 이는 영화 속 감독이 아닌 현실의 감독, 바로 김지운 감독에 대한 신뢰가 반영된 답변일 것이다. 


“오케이면 오케이. 다시 해야 되면 다시, 그게 너무 좋았어요. 원하시는 바도, 저에게서 끌어내고 싶은 바도 정확하고 확실하셔서 항상 감독님을 믿고 연기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물론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니다. 이겨내야 하는 ‘멘붕’의 순간도 있었다. “처음 감독님과 대본 리딩을 할 때 70년대 말투로 연기해야 하는지 몰랐어요. 옛날 성우들이 말하는 것처럼 호흡이 좀 더 과하게 섞여야 하고, 옛날 서울 사투리 같은 말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멘붕이었죠. 대사 한 줄이라도 좋으니 하고 싶다고 했는데 막상 대사가 정말 많은데 당장 제대로 할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그런 말투를 구사할 줄 아는 선생님을 찾아가 도움을 받고, 호흡법도 조금씩 배우고 익혔어요.”

배우는 배우는 직업이라는 말은 단순한 아재개그가 아니다. 배우가 자신과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그 시대의 공기를 관객에게 전하는 매개로서 온전히 살아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직접 접해본 적 없는 1970년대의 말투는 예상치 못했던 직분을 깨닫게 만드는 과제였다. 하지만 1970년대가 정수정에게 넘어야 하는 허들이 된 것만은 아니었다. 정수정을 사로잡은 건 바로 1970년대라는 시대 설정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고 몇 페이지만 읽었는데 ‘이 작품 너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막 읽었어요. 심지어 제 역할이 나오지도 않은 시점에서. 영화 속의 영화라는 설정도 특이한데 1970년대 시대 배경부터 모든 것이 다 매력적으로 다가왔어요. 살아보지 못한 시대에 대한 궁금증이 많은 편인데 그 시절에 관한 레퍼런스를 찾아보면서 까트린 드뇌브나 트위기 같은 당대의 배우나 모델로부터 시각적 영감도 얻었고, 정말 재미있었어요. 언제 제가 1970년대의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링을 해보고, 그 시대의 말투를 구사하는 연기를 해보겠어요.”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건 하고 싶다는 마음일 것이다. 정수정이 가수로, 배우로 살아온 것도 결국 그 마음 덕이었다. “김지운 감독님을 비롯해 저에게 출연을 제안하신 분들 모두 제가 해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을 거라 생각해요. 일단 나 자신부터 믿어야 하겠지만 그런 믿음으로 작업을 제안해 주시는 분들을 믿는 것도 중요한 거 같아요. 그리고 결국 제가 재미를 느끼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계속해야 하는 거라고 믿고, 해낼 수 있어야 한다고 노력하는 거고요. 늘 그랬던 거 같아요. 마음이 맞는 쪽으로 가서 매 순간 최선을 다했을 뿐이에요.” 


내향적인 정수정이 외향적인 운명을 받아들인 비결의 전말은 이렇다. 그렇게 배우 정수정이 되었다. 그리고 인생은 일대일로 대응하는 함수가 아니다. 장담할 수 없는 미지수다. 적어도 정수정은 그렇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모르는 거죠. 나중에 제가 또 뭘 하게 될지,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그래서 늘 새롭게 받아들여요.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고 해서 이게 내 길이라고 확신하거나 장담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러면 너무 힘들 거 같고요. 매번 새로운 작품을 하면서 새롭게 받아들이려고 해요.” 내향적인 정수정은 운명을 딛고 그렇게 배우로 산다. 이끌려 닿았지만 늘 새롭게, 끝내 자신의 것으로.


(<VOGUE KOREA> 10월호에 쓴 인터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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