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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Nov 24. 2023

오승훈, 100% 확실하게

오승훈은 지금 충분히 잘 알고 있다.

누군가와 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뭉근한 궤적을 뒤쫓아 걷는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저 멀리 날아가는 비행기를 따라 그려지는 구름같이 먼 풍경을 막연히 따라 그리다 보니 어느새 그것을 내 삶으로 그리게 됐다는 신기한 이야기. 물론 삶은 영화처럼 점프 컷으로 연결되는 세계가 아니다. 우연일지라도 명백한 인과가 있고, 선택이 있고, 과정이 이어져 늘 지금으로 당도하는 법이다. “12년 전인데, 2주 동안 이 말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던 기억이 지금도 나요.” 배우 오승훈의 삶은 12년 전 부모님과 함께 탄 자동차 뒷좌석에서 비로소 고백할 결심으로부터 시작된 꿈이었다. 학창 시절부터 10년 넘게 농구 선수로 생활하며 대학까지 진학했지만 부상으로 끝내 그것이 자기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과정에서 오승훈의 삶에 틈입한 건 뜻밖에 연기였다. 당연했던 길이 당연하지 않음을 알게 된 것처럼 생각지 못했던 길이 길처럼 열렸다는 경로 이탈의 고백은 분명 흥미진진한 일이다. 물론 제삼자 입장에서 듣기에는 그렇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마음 편히 발 디딜 사정이 아니었다.


“운동할 때 부모님께서 정말 많이 밀어주셨거든요. 고생도 많이 하셨죠. 그래서 농구를 그만둔 뒤 연기하겠다는 말을 하면 걱정만 끼칠까 봐 차마 못하겠더라고요.” 하지만 차돌처럼 단단해진 꿈은 끝내 뱉지 않고 배길 수 없는 법이었다. 다만 마주 보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자동차 앞좌석에 앉은 부모님 등 뒤에서 나직하게 뱉어냈다. “연기를 해보고 싶은데 학원 한번 가보면 안 될까?” 아들의 걱정은 기우였다. 부모님의 걱정은 정작 다른 데 있었으니까. 10여 년 동안 농구만 보고 살아온 아들의 상실감을 걱정했던 부모님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낸 아들이 오히려 대견했다. 아들의 꿈을 지지해온 부모님은 다시 한번 아들의 새로운 꿈에 가장 가까이 탑승한 동반자가 됐다.


<독전>에서 류준열이 연기한 ‘서영락’은 미스터리한 인물이었다. 이 선생이라는 미지의 존재를 둘러싸고 마약 전쟁을 벌이는 살벌한 세계에서 낮게 웅크리듯 정체를 은신하고 기꺼이 아슬아슬한 사선을 건넌다. 결정적인 순간까지 자신의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극의 막바지에 다다라 극적 반전을 이루는 주요한 존재로 떠오른다. <독전 2>는 <독전>의 속편이지만 그 후의 서사를 다루지 않는다. <독전>은 용산역을 배경에 둔 클라이맥스 이후 에필로그에 가까운 노르웨이 배경의 결말부로 점프한다. 그 사이에는 가려진 30일의 서사가 있다. <독전 2>는 바로 그 30일간의 이야기다.


<독전 2>에 출연한 오승훈은 전편에서 류준열이 연기했던 서영락을 연기한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프랜차이즈 영화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그리고 배우가 바뀐 이상 예전에 봤던 그 인물이 마냥 같은 인물로 보일 수도 없는 법이다. <독전 2>가 서영락이라는 이름 대신 ‘락’이라는 이름을 내건 것도 그런 상황을 의식한 결과처럼 보인다. 오승훈 역시 잘 알고 있다. “연기의 재료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같은 인물도 연기하는 배우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는 거죠.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기존 인물과 다른 걸 보여줘야 한다고 여기진 않았어요. 어차피 다른 배우가 연기한 이상 다른 인물로 보일 테니까요. 오히려 그게 재미있는 거 같아요.”

오승훈이 <독전 2>에 출연할 자격을 얻은 건 4차에 걸친 긴 오디션을 통과한 덕분이었다. 만만치 않은 과정 끝에 얻은 기회. 장편영화 데뷔작인 <메소드> 이후 몇 편의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지만 여전히 증명이 필요한 배우이기에 오디션으로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오디션이 <독전 2>처럼 늘 반가운 소식으로 수렴되는 건 아니었다. 그만큼 견디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오승훈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신인 배우는 오디션도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라 여겨야 해요. 작품 안에서 인물을 준비하는 것처럼 프라이드를 갖고 오디션에 임하고 집중해야죠. 물론 결과에 따라 서운하고 속상할 때도 있지만 그 순간의 감정도 당연한 과정으로 받아들이려 해요. 그리고 드디어 제 작품을 만나게 되면 그 모든 과정의 보상처럼 느끼는 거죠.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행복해져요.”


갑자기 물음표가 떠올랐다. 왜일까? 왜 연기가 하고 싶었을까? “고등학교 때 <뉴하트>라는 드라마를 보고 흉부외과 의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어요. 사람 살리는 의사가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그런데 나중에 알았죠. 드라마는 가짜잖아요. 그런데 그 가짜가 이렇게 사람 마음을 건드릴 수 있다니, 배우라는 직업이 맹목적으로 멋있더라고요.” 당연했던 농구가 삶에서 멀어지면서 막연했던 연기가 삶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물론 흥미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할 리 없는 법이다. 부모님께 허락을 받은 뒤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해 유명한 연기 학원을 찾아간 오승훈은 깜짝 놀랐다. “연기는 나를 표현하는 일이더라고요. 운동선수 시절에는 포커페이스가 중요했어요. 냉철한 승부를 벌이는 상황에서 늘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니까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갖고 살아야 했죠. 그래서 충격을 받았어요. 내 감정을 타인도 느끼게 만들 수 있도록 나라는 사람을 게워내야 하는 일이더라고요.”


같은 인물을 연기해도 배우가 다르면 다른 인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은 결국 연기는 배우의 고유한 면면이 반영된 결과일 수밖에 없다는 이해로 다다랐다는 방증일 것이다. 결국 배우란 타인을 연기하기 전에 스스로를 닦는 직업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오승훈도 노력하고 있다고 말한다. “연기하는 인물을 통해 저라는 사람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거 같아요. 그러니 저라는 사람을 잘 쌓아가야 앞으로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겠죠. 요즘은 그런 생각으로 살고 있어요. 그래서 스스로를 이완시키려 노력하고 있죠. 가만히 TV를 보거나 책을 읽는 식으로요. 커피에 관심이 생겨서 커피 공부도 하고, 핸드 드립도 직접 내려요. 원래 그런 걸 잘 못하는 사람이었거든요. 자꾸 움직여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있잖아요. 그래서 요즘은 휴대폰 메모장도 잘 쓰고 있어요. 그렇게 정적인 시간을 보내면 평소 느끼지 못했던 감성이나 하지 못했던 생각이 찾아오는 듯해요. 알 수 없었던 영감이 밀려오더라고요. 그래서 차분한 취미를 찾기 시작했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문득 궁금해졌다. 평소에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편일까? 아니면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편일까? 자신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을까? “사실 요즘 고민거리가 하나 있어요. 나는 ‘P’일까? ‘J’일까?(웃음) MBTI 검사를 해보면 ESFP랑 ESFJ가 왔다 갔다 하는데 계획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다가 굉장히 충동적으로 결정해서 행동할 때도 있거든요. 그런데 연기할 때 이런 게 도움이 되는 면이 있어요. 열심히 계획해서 현장에 가도 상대 배우의 리액션을 보고 충동적으로 함께 모험하듯 새롭게 가보기도 하고, 그럴 때 정말 연기가 재미있더라고요. 그런데 만약 아무 준비도 안 하고 현장에 간다면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판단 자체가 불가능하고, 그 상황에 갇혀서 연기하게 되지 않을까요? 결국 제 안에 둘 다 있다는 게 연기할 때는 편하고 재미있게 느껴져요.”


내가 아닌 남이 되기 때문에 되레 나를 잘 알게 된다는 것, 배우라는 직업은 그래서 내가 아닌 나로 살아간다는 것과 내가 몰랐던 나를 만난다는 것을 즐기는 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삶을 선물한다. 오승훈은 확신에 차 있다. “무대에 서면 행복해요. 연극도, 영화도 정말 재미있고, 연기할 때 살아 있는 거 같아요. 상대 배우와 액션과 리액션을 하고, 스태프와 함께 한 작품을 완성하는 순간이 행복해요. 결과물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보낸 시간이 모두 소중하죠. 지금 제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 느끼고요. 촬영장에 가는 게 가장 행복해요. 이 일을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고 매번 100% 확신하죠.” 지금 오승훈의 삶을 지배하는 건 바로 그 세 자리 숫자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100%의 오늘. 그거면 충분하다. 


(<VOGUE KOREA> 12월호에 쓴 인터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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