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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용준 May 23. 2024

오겐끼데쓰까? 잘 지내나요?

'러브레터'와 이와이 슌지를 몰래 본 1990년대 10대 시절에 관하여.

이와이 슌지 감독과 두 차례 대면한 적 있다. 한 번은 지난 2015년경 <립반윙클의 신부>라는 영화로 내한했을 당시 인터뷰를 위한 것이었다. 이 인터뷰는 내가 집필한 13인의 감독 인터뷰집 <어제의 영화. 오늘의 감독. 내일의 대화.>라는 명저에 실렸다. 너무 뻔뻔한 홍보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너무 좋은 책이라 어쩔 수 없다. 보면 안다. 심지어 올해 세종도서에도 선정된 양서다. 강력하게 필독을 권한다.


두 번째 만남은 바로 작년 11월 5일에 이뤄졌다. 신작 영화 <키리에의 노래>의 국내 개봉을 앞두고 내한했을 때 관객과의 대화 진행 모더레이터로 그를 만났다. 그때 내가 가진 이와이 슌지와 관련한 소장품을 바리바리 싸 들고 가 사인을 받았다. <러브레터>와 <4월 이야기> <릴리 슈슈의 모든 것> 등등, 이와이 슌지의 영화 OST LP와 CD가 대부분이었다.


<러브레터>를 처음 본 건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그 무렵에는 딱히 영화에 대단한 관심은 없었으나 영화를 좋아했던 친구 덕분에 이와이 슌지와 <러브레터>라는 고유명사를 알게 됐다.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영화인데 한국어 자막이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어렵게 구했다고 했다. 마치 야동 비디오라고 구했다는 듯 음침하면서도 의기양양했다.


당시만 해도 일본영화는 한국에 정식으로 수입될 수 없던 시절이라 <러브레터>를 본다는 건 사실상 불법 행위였다. 그리고 설익은 테스토스테론이 충만하던 남자애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수완 좋은 친구가 험한 것을 구해왔을 경우였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호기심은 왕성했던 시절이었으니까. 하지만 친구와 단 둘이 듣게 된 인생 첫 ‘오겐끼데스까?’는 어쩌다 본 야동보다 백배는 더 강렬했다. 친구와 단 둘이 어렵게 구해온 <러브레터> 비디오테이프를 방구석에서 시청하던 시절이었다는 것이 지금 돌아봐도 생소하다. 이것이 1990년대이었다. ‘젠 Z’가 이 맛을 어찌 알겠는가? 하하…… 갑자기 왜 눈에서 땀이 날 것 같지?

경로이탈에서 벗어나 본론으로 재주행해보자. 영화감독을 만나는 직업이라는 걸 꿈꿔본 적도 없었던 10대 시절에 이와이 슌지와 <러브레터>가 내 인생에 들어왔다는 건 이제 와 새삼 흥미로운 추억이다. 이와이 슌지와 만난 순간마다 그 시절로 돌아갔다. 그리고 한 치 앞도 알 수 없지만 보다 흥미로운 저 너머의 삶도 존재하리라 새삼 믿게 됐다. 지난 19년간 수많은 명사들을 인터뷰하고 대화를 나눴지만 애초에 그런 일을 하게 될 것이라 생각해보지 못했거나 기대한 적도 없었던 시절부터 익히 잘 알고 있었던 이름과 조우할 때마다 업의 의미를 초월해 허구의 문턱을 넘어선 듯한 감각이 삶에 깃든다.


덕분에 <러브레터> LP 커버에 서명한 이와이 슌지의 반짝이는 이름을 볼 때마다 신비로운 징표를 획득한 기분이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수집하는 모험처럼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의 벨트 같은 것이랄까? 그래서 책장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두고 매일 올려본다. 저 멀리 어딘가 혹은 저 너머 어디에 있거나 있을지도 모를 기억을 향해 안부를 묻듯이, 매일 돌아보고, 매일 나아간다. ‘오겐끼데쓰까?' ‘오겐끼데쓰네.’


('GQ KOREA' 6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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