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의 밤을 걷다가 보고, 느끼며 생각한 것들에 관하여
“이 동네는 정말 오랜만에 왔는데 변한 게 없네요.” 택시를 타고 귀가할 때 종종 택시기사로부터 듣는 말이다. 하지만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변한 게 없을 리가. 내가 사는 곳은 서울 경복궁역 인근에 자리한, 흔히 서촌이라고 일컬어지는 지역이다. 지난 2013년에 결혼과 함께 서촌에 살림을 꾸렸으니 내가 이 동네에 산 것만 해도 자그마치 11년이다. 그동안 겪어온 변화만 해도 상당한데 서촌이 변한 게 없다고 말하는 택시기사들은 대부분 2013년 이전 시점을 기준에 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그간의 변화는 내가 아는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물론 ‘변한 게 없네요’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게 아니다. 우리 집이 있는 옥인연립에 당도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지나야 하는, 구불구불하면서도 길게 이어지는 옥인길 골목의 형태가 여전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서촌으로 몇 차례 발품을 팔았다면, 혹은 인왕산에 오른 경험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옥인길을 한 번 이상 걸어봤을 것이다. 지난 11년 동안 길의 좌우를 채우는 상점의 풍경은 적지 않게 변했지만 길의 형태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사실 옥인길은 과거 인왕산자락을 따라 내려온 물이 수성동계곡을 거쳐 옥류동천으로 흘러가던 물길을 복개한 길이다. 그러니까 옥인길을 따라 걷는다는 건 실상 조선시대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흐르던 물길을 따라 걷던 이들의 삶을 따라 걷는 듯한, 시간을 초월한 감각이기도 하다.
서촌은 걷는 재미가 여실한 동네다. 모세혈관처럼 동네 곳곳으로 이어지는 작은 골목들을 따라 걷고 마주하며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좁은 골목을 지날 때마다 실질적인 삶이 머물고 있는 개개인의 생활 터전과 아기자기하게 무언가를 팔고자 자리를 빌려 마련한 상점을 마주하고 발견하는 경험은 분명 서울 여느 곳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재미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삶과 낙이 교차하는 풍경 앞에서 주어지는 의미도, 흥미도 상당하다. 한옥과 양옥뿐만 아니라 적산가옥까지,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역사가 각각의 형태로 산재하고 밀집했기에 시간을 따라 걷는 것 같다가도 때로는 거슬러 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경복궁역이나 사직단처럼 오랜 역사와 전통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공간을 산책하듯 접근할 수 있다는 것도 서촌의 매력일 것이다. 서촌 일대를 돌며 구경하는 재미도 상당하지만 서촌을 벗어나 독립문이나 서대문 혹은 삼청동이나 북촌 혹은 광화문 인근에서 청계천을 비롯한 종로 방향으로 1만 보를 채울 요량으로 집을 나서면 선택지가 정말 무궁무진해진다. 이를 테면 사직단을 지나 사직터널 방면으로 걷다가 터널 입구 옆 오르막길로 올라 언덕길을 걷다 보면 홍난파 작곡가가 말년을 보냈다는 홍난파 가옥을 만날 수 있다. 그 너머로 내려다 보이는 도심을 바라보며 언덕길을 따라 걷다가 적당한 내리막길을 만나 쭉 내려가면 서촌에서 보기 힘든 대단지 아파트들을 만날 수 있는데 그 사이 한가운데 자리한 독립문과 인근의 공원을 거닐거나 앉아 쉬는 사람들을 더러 만날 수 있다. 거기서 조금 더 발품을 팔면 서대문 형무소까지도 당도할 수 있다.
한편 경복궁 방면으로 경로를 설정하고 광화문 앞을 지나 너르게 조성된 송현녹지광장을 휘휘 가로질러 서울공예박물관까지 관통하면 대도시의 풍경으로부터 등을 돌리듯 이어지는 긴 골목이 나온다. 그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안국동 윤보선가로 이어지고, 그리로 쭉 걸어가면 삼청동길로 이어져 점점 가파르게 상승하는 오르막과 함께 골목 좌우로 늘어선 한옥을 따라 걷게 될 것이다. 그 길은 삼청동 일대를 내려다보거나 인왕산과 북악산을, 멀리는 남산타워를 눈높이로 마주하며 걸을 수 있는 언덕길로 곧 이어진다. 그렇게 걷다 보면 일찍이 그 길의 주인이었다는 듯 서성이는 길고양이들도 적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렇게 삼청동에서 빠져나와 다시 청와대 방면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다시 서촌 방향으로 들어서게 된다.
수성동계곡에서 인왕산에 오르는 대신 도로 옆으로 이어진 인왕산 자락길로 빠지면 둘 중 하나의 방향을 선택한다. 하나는 인왕산로를 따라 단군성전 인근으로 내려오는 방향이다. 거기서 종로문화체육센터 방면으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가 다시 사직근린공원으로 향하는 성곽길이 있는 인왕산로1길의 오르막과 계단을 거듭 밟아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길 위 가득 얼굴을 드러낸 인왕산과 그 주변 일대의 풍경이 쫙 펼쳐진 성곽 너머의 진경과 맞닥뜨릴 수 있다. 인왕산을 가장 멋지게 관망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른 하나는 수성동계곡에서 인왕산 자락길로 나와 더숲 초소책방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당도하는 전망대 방향이다. 그곳에 당도하면 서촌을 비롯해 경복궁과 청와대를 비롯한 종로 일대는 물론 서울의 풍경이 너른 바다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초소책방을 지나 청운공원 방면으로 걷다 보면 윤동주 문학관에도 다다를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청운동 방면으로 슬슬 걸어 내려와 다시 서촌 방향으로 들어서면 된다.
이 모든 선택지는 주로 여름밤에 걷는 ‘서촌 야행’으로 개발한 코스다. 무더운 낮 대신 상대적으로 선선한 밤에 나보다 걷기 좋아하는 아내를 따라 지난여름 내내 운동 삼아 걸었던 길이다. 1만보 정도를 계획하면 이 정도 발품을 팔게 된다. 그런데 그 여정 덕분에 낮에 본 풍경보다 되레 선명해지는 밤의 면면을 체험했다. 밝고 환한 낮에는 되레 모든 것이 형형해서 손쉽게 지나치게 되던 것들을 밤의 어둠 속에서 오히려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그로 인해 낮보다 선명해지는 밤의 감각으로 다가오는 서울이라는 도시의 다채로운 매력을 더욱 생생하게 만끽하게 됐다. 도시의 지난 세월을 켜켜이 간직한 서촌에 살면서 그 일대를 걸어볼 결심이 가능했기에 가능한 발견이었을 것이다.
물론 서촌이 아니라 해도, 서울 각지에서 느낄 수 있는 각기 다른 매력과 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는 듯 소소하게 변하는 도시의 생태를 발견하는 매력과 묘미는 분명 서촌에서 살아갈만한 재미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 세계의 흐름을 목도하며 변함없이 단단하게 자리해왔을 인왕산과 함께 나란한 산세가 매계절마다 색을 갈아입는 풍경이란 11년간 거듭 봐도 좀처럼 질릴 기미가 없다. 길의 형태는 변하지 않아도 길을 채우는 상점의 풍경이 달라지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치로 다가온다. 늘 거기 자리하고 있지만 때가 되면 서서히 변모하면서도 회복하는 양상은 자연의 섭리처럼 유구하다. 이렇듯 변하지 않는 것 사이에서 변하는 것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서촌이라는 동네에서 살아갈 결심을 거듭하게 만드는 이유일 것이다. 매일 같이 인왕산을 마주하고 붓을 들었던 겸재 정선도 어쩌면 같은 마음 아니었을까.
(서울 시정종합월간지 <서울사랑> 2월호에 쓴 글을 재편집했습니다.)